긴급 자금 투입으로 위기 넘겨

구조적 변화 없인 회복 어려워

中 저가 공세에 韓 산업 휘청

“원료 개선·친환경 전환 시급”

여천NCC 전경. (출처: 뉴시스)
여천NCC 전경. (출처: 뉴시스)

 

핵심 요약

◆여천NCC 사태에 위기감 확산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공동 운영하는 여천NCC가 3100억원 자금난과 3공장 가동 중단 위기에 직면하며 한국 석유화학 산업 전반에 위기 신호가 켜졌다. 대주주 긴급 자금 투입으로 단기 위기는 넘겼으나 장기적 산업 구조 변화 없이는 회복이 어렵다는 진단이다.

◆원료 비용과 환율 부담 가중

한국 석유화학업계는 100% 수입에 의존하는 나프타 가격 상승과 1300원대 원·달러 환율 등 비용 부담에 직면해 수익성 악화가 심화되고 있다. 원료 가격과 환율 변동이 수익성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평가다.

[천지일보=유영선 기자]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공동 운영하는 여천NCC에서 발생한 대규모 적자 사태가 한국 석유화학 산업 전반의 위기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나프타 분해시설 중 하나인 여천NCC는 그동안 안정적인 수익 창출원으로 평가받았지만, 최근 몇 년간 중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경쟁 구도의 변화와 원료 가격 상승, 국내 산업 구조 한계가 맞물리며 실적이 급격히 악화됐다.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생산량 감축과 자구 노력에 나서고 있으나, 심각한 자금 압박으로 부도 위기에 직면하는 등 경기 불황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이에 조만간 발표될 정부 지원 대책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1조 클럽’에서 법정관리 직전까지

여천NCC는 1999년 한화케미칼과 DL케미칼이 합작해 설립한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 내 국내 최대 규모의 나프타 분해시설이다.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각각 50%씩 지분을 보유한 여천NCC는 2020년대 들어 중국발 공급 과잉 영향으로 실적 부진에 시달렸다. 최근에는 전남 여수에 위치한 3공장 가동 중단까지 이어졌다. 특히 3100억원 규모의 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채무 불이행(디폴트)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제기됐다. 다행히 지난달 대주주 한화솔루션이 1500억원 추가 자금 대여를 승인했고, DL케미칼도 이달 11일 긴급 이사회를 열어 2000억원 규모 유상증자 안건을 통과시키면서 위기를 일단락했다.

여천NCC는 국내 에틸렌 생산능력 3위 기업으로, 2017년 영업이익 1조원을 기록하며 ‘알짜 사업장’으로 불렸다. 당시 한국은 수출액 5737억 달러를 달성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고, 석유화학 수출은 전체의 8%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업계 불황과 맞물려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수천억 원대 적자를 기록했다. 긴급 자금 투입과 단기 지원으로 도산 위기는 넘겼지만, 장기적인 산업 구조 변화 없이는 회복이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빅4 석유화학 기업 적자 현실

올해 상반기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의 적자 폭이 크게 확대됐다. 중국발 공급 과잉과 환율 악화가 겹치며 업황 회복에 제동이 걸린 모습이다. 국내 4대 석유화학 기업인 롯데케미칼, LG화학, 한화솔루션, 금호석유화학의 올해 상반기 합산 영업손실은 4762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700억원과 비교해 약 6.8배 증가한 수치다.

업체별로는 롯데케미칼이 3771억원, LG화학 석유화학 부문이 1469억원, 한화솔루션 케미칼 부문이 138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모두 전년 동기 대비 실적이 크게 악화됐다. 특히 LG화학은 지난해 상반기 250억원의 흑자를 냈지만 올해는 약 1500억원에 육박하는 적자를 기록해 큰 폭 부진을 보였다. 반면 금호석유화학은 유일하게 흑자를 유지했으나,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 1858억원은 지난해 상반기 1977억원 대비 6% 감소했다. 2분기 실적은 지난해 1191억원에서 올해 652억원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구조적 경쟁력 약화에 따른 업계 위기

전문가들은 한국 석유화학 산업이 구조적 경쟁력 약화를 겪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주요 제품인 에틸렌은 국내 정유사나 해외에서 수입한 나프타를 NCC(나프타 분해 설비)에서 가공해 생산된다. 과거 중국 경제 성장기에는 한국산 에틸렌의 40~50%가 중국으로 수출되며 높은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최근 3년간 중국은 에틸렌 생산 설비를 대폭 확충했다. 현재 증설된 생산능력은 한국 연간 생산량 1500만톤을 훌쩍 넘는 2500만톤에 달하며, 2027년까지 추가로 1500만톤 규모 설비도 계획돼 있다.

최대 수입국이던 중국이 세계 최대 생산국으로 변모하면서 한국 석유화학 업계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중동 에너지 기업들도 대규모 투자로 원유에서 바로 에틸렌을 생산하는 기술을 확보하며 가격 경쟁에 나섰다. 중국산 제품은 한국산보다 15~20% 저렴하고, 중동산은 30% 수준으로 더 싸다.

한국 기업들은 적자가 확대되자 공장 가동을 줄이고 비주력 사업 매각을 통해 현금을 확보하고 있다. LG화학은 지난해 3월 여수 스티렌모노머(SM) 공장 가동 중단에 이어 최근 수익성 악화로 김천과 나주 공장의 일부 설비 철거를 결정했다. 김천 공장에서는 연산 9만톤 규모의 고흡수성수지(SAP) 생산설비가, 나주 공장에서는 연산 2만톤 규모의 스타이렌 아크릴레이트 라텍스(SAL) 생산설비가 철거된다. 이들 설비는 노후화와 중국과의 경쟁 심화로 인해 생산 효율화 대상이 됐다.

또 올해 상반기 수처리 필터와 에스테틱 사업부를 매각해 약 1조 6000억원을 확보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12월 여수 2공장 5개 라인 중 3개를 스크랩하기로 결정했다. 산업 특성상 가동 중단은 유연하지만, 스크랩은 사실상 시설 포기를 의미해 충격이 크다. 비주력 사업 매각과 자산경량화 전략을 강화하는 가운데 업황 부진이 지속되면 연쇄 철거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롯데그룹은 롯데케미칼의 유동성 위기 해소를 위해 롯데월드타워를 담보로 제공했다. 효성도 특수가스 사업부를 계열사에 매각했으나 재무 부담 우려가 남아 있다.

여천NCC 제1사업장 야경.  (출처: 여천NCC 홈페이지)
여천NCC 제1사업장 야경. (출처: 여천NCC 홈페이지)

◆글로벌 공급 과잉과 가격 하락

2018년부터 중국 정부가 대규모 설비 증설과 세제·금융 지원으로 에틸렌 공급 과잉이 심화됐다. 2018년 톤당 1200달러였던 에틸렌 가격은 2024년 800달러대까지 떨어졌다.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2024년 7월 에틸렌 가격은 톤당 820달러 수준으로, 손익분기점인 1000달러를 밑돌고 있다.

미국도 셰일가스를 활용한 저비용 에틸렌 생산 체계를 구축해 한국 제품의 시장 점유율을 잠식 중이다. 한국은 100% 수입에 의존하는 나프타 가격 상승과 환율 변동에 따른 비용 부담에 직면했다. 2024년 1분기 나프타 가격은 배럴당 약 110달러로 2019년 대비 30% 이상 상승했고, 원·달러 환율도 1300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원료 가격과 환율 변동이 수익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 석유화학 산업은 전통적으로 중간재 제조에 집중해왔으나, 글로벌 경쟁 심화와 친환경 정책 강화가 산업 전반에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중국, 미국, 중동은 정부 지원과 대규모 투자로 톤당 생산 원가를 15~20% 낮춘 반면, 한국은 전기료와 환경 규제 비용 부담이 상대적으로 높아 경쟁력이 크게 약화됐다. 한 업계 전문가는 “한국 기업들은 원료 조달 구조 개선과 친환경·고부가가치 제품 전환이 시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 석유화학 위기 대응 착수

정부는 이번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산업부는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며 설비 폐쇄 및 사업 재편 지원, 원료 공동구매 촉진, 전기요금 인하 등 다각도의 정책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산업계는 이러한 정책들이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엔 부족하다는 비판적 시각이 많다. 한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전기료 인하 등 단기 비용 절감 정책은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원료 조달 구조 개선과 친환경·고부가가치 제품으로의 전환 없이는 경쟁력 회복이 어렵다”고 진단했다. 또한 규제 완화와 대규모 투자 유치 요구가 크지만, 환경 규제 강화와 국제 탄소 배출 기준 강화가 산업계에 추가 부담을 줄 가능성도 크다.

정부가 산업 경쟁력 강화와 환경 규제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다. 산업부는 “국가 차원의 산업 생태계 보호와 미래 전환을 위한 정책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지만, 구체적 실행 방안과 재원 확보는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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