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

허자경

아버지 산소를 다녀온 지도

오래되었다

 

묘지에 눈이 내렸는지,

잡초는 비석의 키를 넘었을,

뻐꾸기 울음소리는

시루떡처럼 쌓여 있는지,

산소길이 긴 장마로

끊어지지 않았는지,

번뇌가 숲처럼 무성한 날

 

내 꿈길을 밟고 걸어오신,

수척한 아버지의 모습에

기어이 산기슭을 오른다

지난겨울에 밟아 놓은

들짐승들의 발자국만

남아있을 뿐

내가 상석에 올린 것은

그저 홍시 한 알,

 

산을 내려오는 그 시간,

발목에 맷돌을 단 듯한

태산 같은 내 업의 질량

 

[시평]

이 시는 아버지의 산소를 방문하지 못한 오랜 시간과 그로 인한 내면의 무거움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탐구한다. 이는 단순히 산소를 방문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삶에서 느끼는 무거운 책임감과 내면의 갈등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심경은 아버지의 모습이 꿈속에 등장하면서 더욱 심화된다. 꿈속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수척한 모습은 화자의 죄책감을 구체화하며, 결국 화자를 산기슭으로 향하게 만든다.

산소에 도착한 화자는 상석에 홍시 한 알을 올린다. 홍시는 단순한 과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 사랑, 그리고 화자가 할 수 있는 소박한 헌신을 상징한다. 마지막 구절에서 “발목에 맷돌을 단 듯한 태산 같은 내 업의 질량”이라는 표현은 화자가 느끼는 삶의 무게와 책임감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도훈 시인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하기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