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칼럼은 국제사회가 오랫동안 해법으로 제시해온 ‘두 국가 해법’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튀르키예 국영 아나돌루통신 수석 기자인 소르와르 알람은 지도 없는 국가, 보호 없는 인정, 사람 없는 영토라는 현실 속에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구상이 공허한 선언에 그칠 수밖에 없음을 짚는다. 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 단순한 ‘국제적 인정’이 결코 주권과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진정한 평화는 점령 구조의 해체와 팔레스타인인의 생명과 권리에 대한 실질적 보장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팔 국가 인정, 주권·생존 보장 어려워
나고르노-카라바흐 사례가 보여줘
국가는 종이 위 선언 아닌 실체여야
평화 출발점, 영토 아닌 생명과 권리
서방의 이중잣대 불신과 냉소 키워
해법은 점령 해체·국제적 안전보장
오는 9월 열릴 유엔 총회를 앞두고 팔레스타인 문제가 다시 논의될 예정이다. 국제사회는 또다시 익숙한 해법, 즉 두 국가 해법을 언급하고 있다. 프랑스와 캐나다를 비롯한 몇몇 서방국가들은 최근 이 구상을 인정한다고 발표하며 팔레스타인 국가를 이스라엘과 나란히 세우자는 목소리에 합류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돌파구처럼 보일 수 있다. 국가 승인 자체가 주권의 초석이며 국제 질서 속에서 한 민족이 정당성을 주장하는 통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교적 언어와 상징적 제스처 이면에는 불편한 현실이 있다. 지도도 없고, 영토에 대한 통제도 없으며 국민을 위한 실질적 보호도 없는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현재의 두 국가 해법은 중동의 평화나 안정에 다가가지 않는다. 오히려 팔레스타인인들이 매일 겪는 구조적 불평등을 덮어버리는 공허한 약속이 될 위험이 크다.
◆땅 없는 국가
근본적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팔레스타인이 국가라면 정확히 어디에 존재할 수 있는가?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 동예루살렘이 가장 많이 언급되지만 이들 지역은 팔레스타인의 통제하에 있지 않다. 가자지구는 20년 가까이 봉쇄된 채 주기적인 폭격과 인도주의적 재난에 시달려 왔다. 서안은 이스라엘 정착촌, 검문소, 군사 시설로 잘게 쪼개져 팔레스타인인들은 서로 단절된 고립된 공간에서 살아간다. 동예루살렘은 점점 이스라엘 관할로 흡수되며 팔레스타인인의 거주권이 위협받고 있다.
국가가 토지·국경·자원에 대한 주권으로 정의된다면 지금 인정되는 것은 무엇인가? 국제 연설이나 정상회의 속 종이 위에서만 존재하는 국가일 뿐이다. 지도 없는 승인은 공허하다. 이는 항해할 바다 없는 배를 지지한다는 선언과 같다.
그래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서방의 인정을 회의적으로 본다. 이미 오슬로 협정 이후 수십 년 동안 비슷한 약속들을 들어왔지만 돌아온 것은 더 깊어진 점령, 확대된 정착촌, 축소된 자유였다.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의 교훈
이 상황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떠올리게 한다. 수십년간 이 지역은 국제적으로는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인정됐지만 아르메니아가 점령했다. 국제사회는 국제법과 주권을 말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이 자국 영토를 회복하려 하자 서방 대부분은 오히려 분노를 드러냈다.
이 선례는 팔레스타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국제사회는 팔레스타인 인정을 통해 권리가 보장된다고 말하지만 인식만으로는 아제르바이잔 영토 점령조차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왜 이런 인식이 자신들을 추방, 유린, 봉쇄로부터 지켜줄 것이라 믿어야 하는가?
보호 없는 인정은 무의미하다. 서방 정부들이 평화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수단일 뿐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정의나 안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땅보다 사람이 먼저다
이 논의에서 종종 잊히는 차원이 있다. 바로 사람들이다. 땅을 주는 지도는 있어도 그 땅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추방·살해·망명된다면 무슨 소용인가?
사람 없는 땅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에 불과하다. 팔레스타인은 단지 영토가 아니라 수백만명이 살아있는 공동체이며 수십년간 강제 이주와 상실을 견뎌온 이들의 삶 그 자체다. 팔레스타인 국가의 꿈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사람, 곧 가자지구에서 포위되고 서안에서 정착민 폭력에 저항하고 중동 전역 난민 캠프에 있고 흩어진 이들을 보호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인도적 생존은 영토 협상보다 우선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안전·존엄·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국가 논의는 시기상조다.

◆국제적 안전보장 필요성
국가 인정이 실제 의미를 가지려면 구체적인 보호 장치가 따라야 한다. 팔레스타인 국가는 선언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방어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팔레스타인을 위한 구속력 있는 국제 안보 보장이 필요함을 뜻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처럼 상호 방위를 약속하는 체제가 있어야 팔레스타인 주권이 무참히 침해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국가 인정 이후 점령으로 이어지고 국제적 분노는 곧 침묵으로 바뀌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팔레스타인 국가는 상징이 아니라 주권과 독립을 갖춘 실체여야 한다. 유엔 회원국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완전한 권리와 책임을 지는 국가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서방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존재하는 ‘2등 국가’에 머물 뿐이다.
◆서방의 선택적 도덕성
서방은 정의, 국제법, 규범 기반 질서를 말하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는 원칙 적용이 선택적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즉각 제재와 군사지원, 비난이 쏟아졌다.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영토권을 주장하자 많은 서방 지도자들은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이 매일 국제법 위반을 당할 때는 ‘쌍방 자제’라는 모호한 말로 후퇴한다.
이중잣대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뚜렷이 보인다. 서방의 인식은 정의가 아니라 지정학적 편의일 뿐이라는 냉소를 강화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공허한 연대 발언이 아니라 점령에 책임을 묻고 권리를 보장하는 구체적 행동이다.
◆신기루 너머
두 국가 해법은 오랫동안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로 제시돼 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국가가 단절된 소규모 영토 조각에 불과하다면, 이는 해법이 아니라 문제를 다른 이름으로 이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평화는 유령 국가의 인정이 아니라 점령 구조 해체, 영토와 자원에 대한 전면적 통제, 국제적 안전보장 속에서 가능하다. 팔레스타인인들을 관리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자기결정권과 존엄, 평등을 가진 민족으로 대우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길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가?
첫째,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폭격·봉쇄·추방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인을 보호하는 것이 즉각적 우선순위여야 한다. 사람들이 없으면 국가 건설의 꿈은 의미가 없다.
둘째, 국제적 보장을 확보해야 한다. 단순한 인정이 아닌, 주권을 존중하고 방어할 실질적이고 집행 가능한 약속이 필요하다.
셋째, 진정한 독립국가여야 한다. 다른 세력에 둘러싸여 통제되는 조각난 영토가 아니라 국경·영공·자원·안보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제사회, 특히 서방은 이중잣대를 끝내야 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우크라이나인이나 아제르바이잔인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권리와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결론
현재 구상된 두 국가 해법은 신기루다. 영토·주권·국민 보호 없는 인정은 해법이 아니라 눈속임이다. 상징적 선언만으로는 봉쇄와 추방 속에 사는 팔레스타인인의 현실을 바꿀 수 없다.
평화는 공허한 제스처가 아니라 정의·보호·평등 위에 세워져야 한다. 우선순위는 생명을 지키고 국민을 보장하며 팔레스타인 국가가 진정한 주권과 독립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지켜지지 않는 약속과 배신당한 세대만 남게 된다.
팔레스타인은 단순한 국가 인정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생존, 주권,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지구상의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