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역사적 기록이라고 모두 사실은 아니다. 특히 국가가 주관하여 정리한 정사는 후대의 권력이 개입할 여지가 많으므로 왜곡될 여지가 많다.

왕씨의 고려를 대신하여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의 조선은 신생왕조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공민왕의 아들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고 매도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혈통을 중시하던 시대의 애환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례의 시작은 진시황과 관련된 출생의 비밀이다. 진시황이 여불위(呂不韋)의 사생아였다는 주장은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 여불위열전>에서 비롯된다. 여불위가 자신의 아들을 임신한 여자를 자초에게 바쳤다는 내용이다.

여불위는 양책(陽翟)의 대상인이었다. 장사를 하러 조(趙)의 수도인 한단에 갔다가 진(秦)의 왕족으로 조에 인질로 잡혀있던 자초를 만났다. 자초의 아버지는 태자 영주(嬴柱)였다. 진은 조와 결맹을 위해 자초를 인질로 보냈다가 결맹을 위반하고 조를 침공했다. 자초는 피살되지는 않았지만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그러나 여불위의 눈에는 가장 확실한 블루칩이었다. 그는 막대한 자금과 지략을 동원하여 이인을 진의 양왕으로 옹립했다. 여불위는 승상이 되었으며, 12개 현을 식읍으로 받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졌다. 자초가 진에 도착한 후 나중에 진시황이 된 영정(嬴政)이 태어났다.

친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의견이 분분했다. 사마천은 엄격한 자료를 토대로 <사기>를 완성했을 때는 여불위가 죽은 지 120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러므로 그의 기록이 날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후한의 반고(班固)는 사마천의 견해를 지지했다. 혈연적 정통성을 중시한 송의 사마광(司馬光)은 단호하게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규정했다.

명의 왕세정(王世貞)은 이러한 전통적 주장에 최초로 제동을 걸었다. 그는 <독사후변(讀史後辨)>에서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었다는 설은 위조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불위 자신이 부귀를 누리기 위해 허황된 말을 지어냈을 가능성과 여불위의 문객들이 나중에 진시황을 폄하하기 위해 지어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학계의 거장 왕세정이 의문을 제기하자 후대의 학자들도 다투어 고증을 통해 진시황의 생부를 가려내려고 노력했다.

특히 소설가들이 더욱 열심이었다. 1940년대에 곽말약(郭沫若)은 <십비판서(十批判書)>에 여불위와 진시황의 관계에 대한 한 편의 논문을 실었다. 그는 우선 사마천의 기록에 대해 3가지의 의문을 제시했다. 첫째, <사기>의 기록은 <국책(國策)>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증거가 없다. 둘째, 춘신군(春信君)의 경우와 너무 흡사하여 소설가들이 지어낸 말과 같다. 셋째, 여불위전의 문장은 사마천의 문장과 다르다. 곽말약을 이어 여러 역사학자들도 사마천의 관점을 부정했다. 임검명(林劍鳴)은 <진사고(秦史稿)>에서 여불위가 진시황에게 자기 아들임을 암시하여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퍼뜨린 말이라고 했다. 마백비(馬白非)는 여불위가 여자를 자초에게 바쳤다는 자체가 허망한 말이라고 했다. 그는 사마천이 많은 자료를 인용한 <전국책>에 여불위가 미녀를 자초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진시황의 정치적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해 <사기>를 조작한 셈이다.

20세기 말에 진시황의 출생에 관한 논쟁이 재현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곽말약의 견해에 반대하고 사마천을 지지했다. 곽지곤(郭志坤)은 곽말약의 3가지 의문점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막수장(莫秀璋)은 사마천의 기록은 허구가 아니며 여불위전의 문장도 후대에 첨가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1990년대 말 임검명은 자신이 10년 전에 발표했던 견해를 수정하여, 후세인들이 진나라의 문화와 가치관에 도덕성이 결핍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생아’ 또는 ‘사통(私通)’이라는 극도의 치욕적인 비난을 퍼부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에 진시황의 정적들이 그에게 모욕을 가하기 위해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후세인들은 진시황의 어머니가 여불위의 여자였던 사실을 들어 진시황을 여불위의 사생아라고 공격했지만, 그것으로 진시황이 여불위의 사생아임을 증명할 수는 없다. 진시황이 여불위의 사생아였다고 해도 그것이 진시황의 업적을 폄하할 수는 없다. 실제로 역사상 많은 위인들이 사생아였지만 그것이 그들의 위대함에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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