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나는 가을이 그립지만 고대 중국인들에게 가을은 공포의 계절이었다. 긴 겨울을 나기 위한 식량을 확보하려는 흉노의 침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유(烏維)선우 이후 흉노의 정권은 모두 단명했기 때문에 장자상속 전통도 무너졌다. 서역의 지배자였던 흉노는 이광리(李廣利)의 대완(大宛) 원정, 한과 오손(烏孫)의 결혼동맹으로 큰 타격을 입혔다. 적극적인 대외확장정책을 시도했던 무제가 사망하자, 그동안의 전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던 흉노도 한동안 도발하지 못했다. 이 무렵 흉노의 정국은 한에서 투항한 위율(衛律)이 주도했다.
흉노로 투항하기 전까지의 자세한 정보는 없지만, 아버지가 장수(長水)의 호인(胡人)이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흉노의 혈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나중에 투항한 이릉(李陵)보다 더 권세를 누렸다. 이릉은 크게 활약하지 못했지만, 그는 후계자 옹립에도 큰 역할을 했다. 위율은 이광리가 정치적 문제로 흉노로 투항했을 때 위기를 맞이했다. 이전까지 한에서 흉노로 투항한 사람들은 중하위직 관리나 장군에 불과했다. 이광리는 무제의 처남으로 한군의 총사령관을 역임한 고관이었다. 호록고선우는 이광리를 사위로 삼아 극진히 대우했다. 위율은 위기감을 느꼈다. 마침 선우의 모친이 중병에 걸리자 위율은 무당을 시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전에 출병을 앞두고 제사를 올릴 때 항상 이광리를 잡아서 사당에 바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후께서 중병에 걸린 것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잡혀 온 이광리가 자기를 죽이면 흉노도 망할 것이라고 했지만, 선우는 그를 죽여서 사당에 바쳤다. 얼마 후 몇 달 동안 눈비가 내려 수많은 가축을 잃었고, 전염병이 돌아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되었다. 선우는 이광리의 저주를 풀려고 사당을 지었지만, 선우의 총애는 위율에게 돌아갔다. BC 87년 한무제가 사망했다. 2년 후 호록고선우도 사망했다. 죽음을 앞둔 호록고는 어린 아들 대신 동생 우곡려왕(右谷蠡王)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원래 호록고선우는 배다른 동생을 좌대도위로 삼았지만, 위협을 느낀 호록고의 어머니는 좌대도의를 암살했다. 좌대도위의 동복형은 그것을 원망하여 신임 선우를 찾아뵙지 않았다.
흉노는 매년 정월, 5월, 9월, 용성(龍城)에서 개최되는 정기회의에서 선우의 옹립을 결정했다. 참가자는 장(長)이라고 했지만 정확한 범위를 알 수는 없다. 정월에 열린 회의는 정치에 관한 일을 결정했으며 참가자는 선우의 친족이나 알지의 집안과 같은 고급 귀족들이었다. 5월대회는 제사를 지냈으므로 씨족장 전부를 포함했을 것이다. 9월대회는 인구와 가축을 점검하기 위한 집회였으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을 것이다. 9월대회 이후 흉노는 겨울을 나기 위해 부족한 곡식을 확보하려고 남쪽의 농경민을 침략했다. 천고마비란 원래 이 시기에 중국인들이 느끼던 공포심을 나타낸 말이었다.
위율은 차제후(且鞮侯)선우 시대에 정령왕(丁寧王)이 되었다. 정령왕은 나중에 이릉이 계승했다. 위율은 호록고 시대에 선우의 측근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호록고의 사후 용성대회가 열리기 전, 위율은 전거(顓渠)알지와 공모하여 유력자들을 포섭했다. 주모자들은 선우의 죽음을 숨기고 대회를 개최했지만, 위기를 느낀 좌현왕과 우곡려왕은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위율은 알지와 함께 호록고의 유조를 위조하여 좌곡려왕을 호연제(壺衍鞮)선우로 추대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흉노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호연제가 선우로 즉위하자 한에서도 무제의 뒤를 이어 유불릉(劉弗陵)이 소제(昭帝)로 즉위했다.
동아시아의 양대세력은 그동안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일시적이나마 우호적 관계를 추구했다. 흉노에 억류되었던 소무(蘇武)와 마굉(馬宏)은 한으로 송환되었다. 이릉도 귀국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흉노는 원래 농성전에 능하지 못했다. 유목생활을 하던 그들은 성을 쌓아 정착하는 것보다 광활한 땅에 이동하면서 생활했다. 전쟁의 양상도 기병을 중심으로 싸우다가 불리하면 재빨리 물러났다. 워낙 땅이 넓었을 뿐만 아니라 사막과 산악이 많았으므로 이동하면 추격이 어려웠다. 그러나 위율이나 이릉처럼 항복한 사람들에 의해 진지를 구축하거나 성을 쌓는 방법을 익혔다. 천고마비의 공포는 이들이 주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