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주필)

 
긴 장마 끝이라 물이 흔해서 도봉산 계곡에는 맑은 물이 콸콸 흘렀다. 중턱쯤이었을까. 무더운 날씨여서 거기까지 오르는데도 숨이 차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넓은 자리가 없는 좁은 계곡이기에 몇 사람은 돗자리에 않고 그 자리를 놓친 사람들은 바위에 걸터앉아야만 했다. 산꼭대기 어디서 그렇게 많은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지는 모르지만 계곡물은 발이 시리도록 차가왔다. 그 물은 아래로 아래로만 흐르고 흐르다 군데군데 바위틈에서 작은 연못을 이루어 맴돌기도 했다.

그 곳에는 놀랍게도 물고기 떼들이 여유롭게 회유(回遊)하고 있었다. 등줄기는 검고 배는 은빛인 작은 물고기들이었다. 물고기 떼들은 가끔은 일제히 배를 뒤집어 보이는 싱크로나이징(Synchronizing) 수영 솜씨를 뽐내어 흥미를 끈다. 그때 물속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자못 강렬한 은빛은 눈을 부시게 한다. 이 높은 계곡에, 물고기가 산다니! 볼 때마다 신기하다. 이날 역시 그 같은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저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 좁은 도봉산 계곡에까지 왔단 말인가.

산을 오르는 동안은 힘들지만 일단 오르고 나면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던진 듯이 상쾌하다. 기분이 너무 좋다. 높은 곳에서 땀을 훔치며 처음 출발한 저 낮은 곳을 바라보는 기분은 일종의 고진감래(苦盡甘來) 끝의 성취감이나 승리감과 같은 것이다. 정상을 밟으면 더 말할 것 없겠지만 목표가 중턱 계곡이었다면 그 정도에 이르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충분히 좋다. 정상이든 중턱이든 목표 지점에 닿는 성취를 이루어낸다는 것, 그것은 바로 궁극적으로는 행복감으로 연결된다. 행복은 물리적인 실체가 없다. 물건이 아니다. 행복은 마음으로 느끼는 느낌일 뿐이지 손으로 만져지거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 제퍼슨이 그가 기안한 미국 헌법에 ‘국민이 행복할 권리’를 명문화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권리(Pursuit of happiness)’라고 분명히 선언한 것은 그 같은 행복의 속성을 의미심장하게 살린 것이 아닌가.

이를 테면 갖고 싶은 보석을 사서 호주머니에 넣었다면 그 보석 자체가 행복의 실체일 수는 없다. 그 갖고 싶은 보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것, 그 추구의 달성에서 오는 주관적인 만족감이 행복이 아닌가. 따라서 행복감은 쉽게 날아가 버릴 수 있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순간적인 것이며 설령 그 보석을 오래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보석만 오래 남는 것이지 행복감이 오래 남는 것은 아니다.

사냥꾼이 짐승을 잡아 허리에 꿰찼더라도 그 짐승이 행복은 아니다. 그는 그 짐승으로 영원히 행복할 수 없으며 그가 만약 사냥하는 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는 또 사냥을 나가야 한다. 보석을 좋아하는 사람 역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꾸 새롭고 진귀한 보석을 손에 넣으려는 목표를 추구해야만 한다. 돈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정치인이나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목표한 자리에 뽑히거나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는 것은 분명히 행복감을 안겨주지만 그 자리 자체가 평생 안주할 불변의 행복은 아니다. 그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 더 큰 권력, 더 높은 자리를 계속 추구해야 한다.

이렇게 행복이라는 것을 더 높은 것, 더 큰 것, 더 좋은 것, 더 부자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행복이라고 한다면 분에 넘치는 목표의 추구는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큰 고통을 안겨주기 마련일 것 같다. 현인(賢人)들이 작은 것, 부족한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을 강조한 까닭은 그런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목표의 추구가 행복이라면 그 ‘추구’를 멈출 줄 아는 사람, 참 어려운 얘기지만 탐욕을 다스리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오래가는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말이 무리 없이 성립한다.

우리는 정상을 꼭 밟아야만 된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도봉산 중턱 계곡에 머물렀지만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기분이 좋고 행복할 수 있었다. 그 시린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오순도순 담소를 나누며 얼린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 같은 분위기가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사람은 이렇게 누구와 교감을 나누어야지 혼자서는 행복하기 어렵다. ‘술이 들어가면 지혜는 나간다(When wine is in, wit is out)’는 말이 있지만 산을 오를 때 지고 갈 수 있는 등짐의 한계 때문에 계곡에서만은 그 ‘지혜’가 빠져 나갈 만큼 코가 비뚤어지도록 먹을 술과 음식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 날의 분위기는 그 자리에 옹기종기 모인 인연들이 한결같이 소중해 보이고 좁은 자리와 부족한 음식에도 모두들 넉넉하게 만족하고 즐거울 수 있었다. 행복이 뭐 별 것인가. 부족한 것에도 작은 것에도 낮은 곳에서도 만족할 줄 알면 행복한 것 아닌가.

하지만 사람은 탐욕을 버리기 쉽지 않으므로 그것이 어디 그리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까지는 딱 좋았는데 기분이 좋아지니 더 마시고 더 기분이 좋아지고들 싶어 했다. 한 번 성취해 얻은 행복감은 사리지기 쉬운 그것의 속성대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더 행복해지고 싶은 무언가를 또 추구하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계곡을 내려와 한잔 더, 한 잔 더 하다가 계곡에서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며 절제의 모습을 보이던 신사들은 하나 둘 점차 자세가 흐트러지는 취객(醉客)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계곡에서 딱 기분 좋았을 때 멈추고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데 좁은 계곡의 고인 물에 거슬러 올라와 노는 물고기들은 왜 즐거워 보이지? 그것들도 마치 사람의 욕심이 행복을 추구하듯이 본능적으로 뭔가를 추구해 더 높은 계곡으로 올라갈 것인가?

국민 행복시대다. 박근혜 대통령 정부 들어 국가 경영의 최우선 목표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 행복으로 선포됐다. 국민 행복이 국정의 중심이며 핵심이다. 국민 행복의 토대가 되는 국민 복지다. 이는 국민 부담이 전제가 돼야 하는 것이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국민에게 그 부담을 안기지 않으려 증세 없는 지하경제 양성화와 세출구구조정과 같은 대책들을 애써 강조한다. 누가 봐도 복지재원과의 처절한 싸움이며 국민의 욕구가 부담은 싫어하면서 계곡에서 내려온 뒤 한 잔 더, 한 잔 더 하는 식이 되면 그 싸움은 너무 벅찬 것이 된다. 그 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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