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성 전 명지전문대 겸임교수/법학박사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고 통치를 받은 기간은 35년인가, 40년인가.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을 기점으로 보면 40년이고, 한일합방이라는 국치를 당한 1910년으로 보면 35년이다.

기점이 어디든,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제국주의 치하에서 경제적 수탈과 정체성 말살을 당해야 했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 등 반문명적 전쟁범죄도 겪어야 했다. 그래서 1945년 독립을 기념한 광복절은 민족이 환호하면서도 역사적 치욕을 되새길 수 있는 의미 있는 날이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중심 세력으로서 우리 민족이 일본을 용서하고 중국과 외교적 연대를 통해 동아시아 전쟁이 다시는 발발하지 않도록 지역적 안전망 구축을 다짐할 수 있는 날이어야 한다.

동아시아 전쟁은 일본이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노구교) 사건으로 중국을 침략하면서 시작됐다고 보는 시각이 보편적이다. 그럼 동아시아 전쟁은 언제 종전됐을까.

대부분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냉전기 동아시아 전쟁으로서 한국전쟁 정전협정일인 1953년 7월 27일로 보는 이설(異說)도 있고, 베트남 전쟁이 종전된 1975년 4월 30일을 동아시아 전쟁 마지막 날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1945년 8월의 광복절은 완전한 민족의 독립을 의미할 수 있었는가. 세계 2차대전으로 독일에 점령당했던 프랑스 사례를 살펴보자. 프랑스의 전쟁 영웅인 드골은 승리를 통해 나치정권을 패퇴시켰다고 당당히 말했다. 물론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은 비웃었다.

전쟁의 주요 분기점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 첫날 투입된 병사가 연합군 약 15만 6000명이었고, 그중 프랑스군은 177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프랑스 망명정부의 역할은 미미했다.

전쟁 영화를 보면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약이 매우 영웅답게 나오지만, 실제 독일군의 기록과 진술을 보면 프랑스 본토의 국민 대부분은 나치독일에 친화적이었고 협조적이었으며, 유대인도 자발적으로 체포해 순순히 넘길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레지스탕스를 군사적으로 염려한 흔적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드골은 1944년 8월 25일 휘하의 군대와 함께 수도 파리에 할리우드 스타일로 입성하며 ‘독립’을 형식적으로나마 쟁취했고 이를 기반으로 친나치 과거 청산을 단행했다. 상하이 임시정부도 독립군과 함께 귀국하는 이런 모습을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1945년을 앞둔 한반도는 프랑스와 너무나 달랐다. 우선 일본의 전후 전략이 의심쩍게 진행됐다. 1941년 만주 관동군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70만명이 넘는 최정예 부대였다. 하지만 1945년이 되기까지 관동군의 군병력을 30만명만 남기고 군인 대부분과 장비를 일본 본토 등 후방으로 배치했다. 

더욱이 1945년 8월 9일 소련이 ‘폭풍작전’으로 명명한 대일본전에 참전하자 일본 정부는 관동군에게 전면적인 결전을 피하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지침을 내리기까지 했다.

반면에 일본은 1945년 여름까지 제주도 전역에 해안포대, 대공포 진지, 지하갱도를 설치했으며 일본군 약 7만명을 제주도에 주둔시키기까지 했다.

일본의 이해하기 힘든 전략으로 인해 소련군은 일본 상륙작전을 하지 않고, 한반도 38선까지 전투다운 전투를 한 번도 치르지 않으며 무혈 진격할 수 있었다. 반면에 미국은 소련의 남진을 막기 위한 한반도 분할에 서둘러 착수하게 된다. 물론 전쟁 당사국인 일본 자체는 분할통치에서 벗어나고 말이다.

급박하게 돌아간 국제정치의 흐름 속에 상해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프랑스 망명정부와는 완전히 다르게 취급당했다. 임시정부는 승전국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단체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광복군도 미군정에서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해 무장을 해제당한 채 귀국했다.

그 이면에는 패전을 예상한 일본의 치밀한 각본이 있었으며 그 시나리오에 따라 소련의 일본침공을 대신한 한반도 남진(南進)과 미군정의 다급한 대응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후에 벌어진 남북분단과 극도의 미소 냉전체제 속에 민간인 200만명을 포함해 약 350만명이 사망하는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다. 그 뒤를 이어 1955년 11월부터 1975년 4월까지 약 20년의 베트남 전쟁까지 발발해 또 다른 300만명이 희생당했다.

한국인은 모든 것이 파괴된 극도의 절망에 빠진 폐허에서 2024년 기준 1인당 GNI 약 3만 6624달러로, 인구 5000만명 이상 국가 중 세계 6위의 국가를 만들어냈다. 

우리를 가혹하게 통치했던 일본(7위)을 뛰어넘은 역사적 쾌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의 의도적인 소련군 남진 유인과 미군정의 분할통치 결정은 지금도 역사적 결과물로 남아 있다. 

통일부 명칭을 바꿔야 할 만큼 남북한의 이질성은 심화했고, 민족적 동일성도 크게 훼손된 상태다. 김정은 정권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같은 민족에게 핵폭탄도 불사하겠다는 북한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는 형국이다. 

동아시아가 두번 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국제적 연대는 아직 희망 수준에 불과하다.

광복절이 민족의 축제이어야 할 날이지만, 우리 앞에 놓인 숙제는 아직까지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새 정부가 들어선 지 2개월이나 지난 시점에서 뜬금없는 정부의 ‘국민임명식’이 광복절에 있다고 한다. 광복절과 상응할 수 있는 행사인지부터가 의아스럽다. 

더욱이 광복절 사면에 조국, 윤미향 전 의원이 포함돼 한국 정치의 절반인 야당도 불참하는 등 민심도 흉흉한 편 아닌가.

1945년 그날을 둘러싼 국제적·국내적 흐름과 거센 소용돌이 그리고 당시 새로 편제된 국제질서에서 지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보다 책임감 있는 마음으로 광복절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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