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세계 경제 대국인 미국과 중국이 인공지능(AI) 산업을 이끌어가는 가운데 많은 국가가 AI를 놓고 고심이 크다. 기술을 선도하기엔 격차가 너무 크고 그저 따라가기엔 자존심뿐만 아니라 시대 자체를 놓치기 때문이다.

외교 정책과 유럽연합(EU) 사안을 취재해 온 프리랜서 기자 보얀 스토이코브스키는 유럽이 AI 사업을 다루는 방식과 과제를 분석했다. 그는 유럽의 우수 연구자들이 미국 등으로 유출되는 상황에서 윤리성과 실험을 병행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이 시급하다며 유럽이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단일 전략, 공동 투자, 과감한 실행력이 필수적이라고 제시했다.

 

보얀 스토이코브스키. ⓒ천지일보.
보얀 스토이코브스키. ⓒ천지일보.

 

美中이 선도하는 세계 AI 시장

유럽, 성장 자본·인재 부족 시달려

윤리 보장·실험 가능 생태계 필요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승부나선 유럽

AI 법안 통해 ‘신뢰 기반’ 규제 모델

글로벌 경쟁력으로 삼으려는 전략

 

유럽의 AI 도약 기회 실재하나 취약

단결력, 자본, 전진할 용기 필요해

올해 초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인공지능(AI) 인프라에 최대 2000억 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추격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었고 신호였다. 미국과 중국이 AI의 미래를 정의하는 동안 유럽은 더 이상 조용히 관망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를 ‘문샷(moonshot, 달 탐사와 같은 야심적 프로젝트)’이라 불렀다. 보다 신중한 이들은 그것을 꼭 필요했던 경각심으로 봤다. 유럽의 AI 비전은 오랫동안 익숙한 장애물들인 단절, 자금 부족, 규제 지체, 그리고 실리콘밸리 등으로 향한 두뇌 유출 등에 짓눌려왔다.

하지만 올해는 뭔가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문제는 이것이 지속 가능한가다. 유럽은 가장 큰 모델이나 가장 빠른 칩을 만드는 경쟁에서 이기려 하지 않는다. 그 경쟁은 이미 진행 중이며 주로 오픈AI, 구글 딥마인드, 메타, 앤스로픽 같은 미국 기업들이 지배하고 있다. 대신 EU는 다른 것에 베팅하고 있다. 바로 ‘신뢰’다.

2024년 8월 종합적인 AI 법안이 시행됨에 따라 EU는 유럽의 규제 모델, 즉 위험 기반, 가치 중심, 권리 중시야말로 최대 강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연방 차원의 AI 규정 도입을 망설이는 미국과 국가 중심 개발 전략을 펴는 중국 사이에서 유럽은 ‘개인의 권리를 중심에 두고 고위험 시스템을 엄격히 통제하는’ 다른 선택지를 제시한다. 이는 일반개인정보보호법(GDPR)을 알고리즘에 적용한 것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비판론자들은 이로 인해 과도한 규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지지자들은 이를 새로운 경쟁력, 즉 ‘신뢰 기술(trust tech)’ 전략이라 본다.

진실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다. 실제로 규제 부담에 짓눌린 스타트업들이 고전할 위험은 존재한다. 하지만 투명성과 공정성을 중시하는 AI에 대한 글로벌 수요도 커지고 있다. 유럽이 선도하고자 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AI 기가팩토리로 기반 다지기

EU는 대규모 데이터 센터인 최대 5개의 AI ‘기가팩토리’를 구축하려는 새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진정한 AI 개발을 위한 물리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더 큰 전략의 일부다. 공공 및 민간 자본이 함께 뒷받침하는 이 계획은 윤리적 방관자에 머물지 않고 최첨단 개발이 실제로 이뤄지는 장소가 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차세대 GPU 10만개 도입과 엑사스케일 컴퓨팅 역량 구축 계획도 이런 야망의 일부다. 아직 충분하진 않지만 출발은 했다.

유럽에는 실제로 강점도 있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은 로봇공학, 광전자, 에너지 효율형 칩 분야에서 세계적 연구 기관과 우수 인재를 갖추고 있다.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장비를 만드는 네덜란드의 ASML은 전 세계 반도체 생태계의 조용한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ASML의 기술 없이는 미국 대기업들조차 멈추게 된다.

하지만 하드웨어만이 전부는 아니다. 흔히 느리고 과도하게 관료적이라 무시당하는 EU의 공공 부문이 비장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의료, 에너지, 교통 등 분야에서 유럽은 고품질의 구조화된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대규모 AI 모델 훈련에 필수적인 자산이다. 이 데이터를 안전하고 윤리적으로 활용한다면 언어 다양성과 분야별 특성, 현실 세계의 실용성을 반영한 ‘유럽형 기초 모델’ 구축도 가능하다.

◆스스로는 메울 수 없는 자금 격차

그러나 야망만으로는 부족하다. 유럽과 미국 간 AI 자금 격차는 여전히 놀랍도록 크다. 작년 미국 AI 스타트업들은 유럽의 동종 기업보다 거의 10배 많은 자금을 유치했으며 이 격차는 생성형 AI 붐 이후 더 벌어졌다.

유럽의 벤처 자본은 위험 회피적이고 단절돼 있으며 과감한 도전에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EU의 인베스트EU 프로그램이나 각국의 지원 제도조차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나 중국 선전에 비해 스케일에서 밀린다. 성장 자본에 대한 접근성이 개선되지 않으면 유럽 AI 창업자들은 계속해서 회사를 팔거나 미국으로 떠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비즈니스 문제가 아니라 전략적 문제다. 유럽이 신뢰할 수 있는 AI의 기준을 세우고 싶다면 실제로 AI를 개발하고, 인재를 훈련시키고, 제품을 수출하며, 글로벌 플랫폼을 주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AI의 미래는 다른 곳에서 쓰여지고 유럽은 그저 남의 기술을 소비하는 소비자에 머물게 된다.

베를린, 자그레브, 탈린의 창업자 누구에게 물어봐도 답은 같다. 가장 어려운 건 코딩이 아니라 훌륭한 인재를 찾고 그들을 붙잡는 일이다.

유럽에는 ETH 취리히, INRIA, 옥스퍼드, TU 뮌헨 등에서 훈련받은 세계적 AI 연구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 중 너무 많은 인재들이 해외로 빠져나간다. 더 높은 연봉, 더 쉬운 연산 자원 접근, 위험을 더 용인하는 환경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의 매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해결책은 단지 연봉 인상이 아니다. 연구자들이 실험하고 연구 성과를 사업화하면서도 윤리적 틀 안에 머무를 수 있는 AI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비자 정책도 중요하다. 현재 유럽은 글로벌 AI 인재, 특히 글로벌 사우스 출신 인재를 유치하는 데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 있다.

2023년 11월 2일 영국 블레츨리 파크에서 열린 AI 안전 정상회의. 이 정상회의에서 인공지능(AI) 안전에 관한 선언이 발표됐다. 이 선언에 따라 유럽연합(EU)과 회원 28개국은 AI가 안전하고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개발되고 사용되도록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적 노력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출처: 뉴시스)
2023년 11월 2일 영국 블레츨리 파크에서 열린 AI 안전 정상회의. 이 정상회의에서 인공지능(AI) 안전에 관한 선언이 발표됐다. 이 선언에 따라 유럽연합(EU)과 회원 28개국은 AI가 안전하고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개발되고 사용되도록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적 노력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출처: 뉴시스)

◆제로섬이 아닌 대서양 협력 기회

언론은 종종 유럽과 미국 간 AI 경쟁을 대결 구도로 다루지만 더 흥미로운 이야기는 ‘협력’이다.

EU와 미국은 이미 AI 안전 원칙에 대해 공조하고 있다. 공동 표준, 공유 모델 평가 프레임워크, 상호운용성 지침 등이 논의 중이다. 백악관의 AI 행정명령은 AI 생성 콘텐츠에 워터마크를 적용하는 것부터 핵심 인프라의 위험 관리까지 EU의 가치와 닮아 있다.

별도의 규제 벽을 만드는 대신 대서양을 넘어 신뢰를 구축하는 기회가 있다. 민주적 가치가 AI 혁신의 기반이 되고 유럽이 최첨단 시스템의 행동을 규율하는 규범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구조입니다.

물론 자동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EU는 여전히 더 많은 투자, 더 빠른 실행, 더 단일화된 목소리가 필요하다. 지금은 회원국들이 각자 자국 AI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 프랑스는 미스트랄(Mistral)이라는 자체 모델을 밀고 있고 독일은 산업 자동화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동유럽은 여전히 뒤처진 형국이다.

공동 연산 자원, 통합 데이터 인프라, 분야별 연계 배치를 아우르는 통합 유럽 AI 전략은 단지 5개 기가팩토리보다 훨씬 큰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유럽의 AI 도약 기회는 실재하지만 동시에 매우 취약하다. EU가 올바르게 움직인다면 세계가 따를 수밖에 없는 안전하고 투명하며 실용적인 AI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잘못 움직인다면 또다시 주변부로 밀려날 수 있다.

지금은 규제 청사진, 인프라 로드맵, 정치적 의지가 마련돼 있다. 그러나 이를 지속 가능한 경쟁력으로 전환하려면 선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단결력, 자본, 그리고 유럽만의 강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과감하게 전진할 용기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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