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풍요의 시대에 여전히 수억 명이 굶주리고 교육과 의료, 식수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 크리스토퍼 라이언 마볼록 필리핀 아테네오 데 다바오 대학 철학과 부교수는 세계적 극빈층에 대해 단순한 소득 부족이 아니라 자유와 기회의 결핍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세계화와 기술 발전은 일부 국가에만 혜택을 몰아주며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며 이제 빈곤을 개인 책임이 아닌 국제적 윤리 문제로 바라봐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크리스토퍼 라이언 마볼록 필리핀 아테네오 데 다바오 대학 철학과 부교수. ⓒ천지일보
크리스토퍼 라이언 마볼록 필리핀 아테네오 데 다바오 대학 철학과 부교수. ⓒ천지일보

 

세계 극빈층, 감소해도 7억명 남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87% 집중

 

기술 진보 불평등 키우는 아이러니

세계화 혜택은 특정 국가에만 쏠려

개도국 정체와 경제적 배제 심화돼

 

빈곤, 개인 실패 아닌 시스템의 실패

식민 지배·불공정 정책 설계가 원인

구조적 해결 없이는 진전도 제한적

2019년 한 해에만 5세 미만 아동 520만명이 빈곤으로 사망했다. 극심한 빈곤은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로 자리 잡았다. 서구 사회의 풍요 속에서도 세계 빈곤층은 자신들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수백만명이 굶주리고 있으며 양질의 교육과 의료, 식수 공급조차 없고 물리적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극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전은 새로운 경제 정상의 일부로서 전 세계 공동체가 반드시 달성해야 할 시급한 과제다.

빈곤을 종식하거나 최소한 상당 부분 감소시키는 것은 유엔개발계획(UNDP)의 주요 목표다. UNDP의 패러다임은 19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이 제시한 ‘역량 접근법’이라는 개발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자유의 부족이 인간에게 초래하는 가장 가혹한 결과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센은 복지경제학이 빈곤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 한계가 있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있어 빈곤은 단순히 소득의 부족으로 설명할 수 없다. 빈곤은 물질적 자원의 결핍을 넘어서는 문제다.

이 인도 출신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는 빈곤이 사람들의 자유 부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빈곤층은 삶에서 좋은 선택지를 갖지 못한다. 빈곤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기회가 부재한 데서 비롯된다.

유엔이 2030년까지 달성하고자 하는 17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에서도 빈곤 문제는 최우선 과제로 다뤄지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현재 극빈층은 7억 3600만명에 이른다.

지난 10여년 동안 빈곤은 감소 추세에 있다.

극빈층(국제 빈곤선 기준 하루 1.90달러 미만으로 생계 유지)의 인구는 1990년 최고치인 19억명에서 감소해 왔다. 이는 1990년 세계 인구의 36%에서 10.1%로 줄어든 수치다. 세계은행은 2017년 극빈 비율이 10.1%에서 9.2%로 하락했다고 보고했다. 전 세계가 빈곤 감소에 어느 정도 진전을 이뤘지만 이는 충분치 않다. 빈곤은 여전히 개인과 공동체, 인류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지난 세대에 걸쳐 인류가 이룬 가장 큰 성취는 기술 진보였다. 이는 특히 중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기여했다. 1980년대에 정권을 잡은 덩샤오핑 주석은 중국 경제가 낙후돼 있음을 인식했다. 그는 유럽 선진국들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직접 살펴보고자 해외로 나갔다. 이후 중국 경제를 외국 자본에 개방하면서도 정치 체제는 유지했다. 미국 경제학자 제프리 D. 삭스는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정책으로 인해 성장이 억압된 잠자는 거인이 깨어났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2020년 12월 13일 예멘 사나에 있는 알사빈 병원에서 아버지가 영양실조 아동의 발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2020년 12월 13일 예멘 사나에 있는 알사빈 병원에서 아버지가 영양실조 아동의 발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현대화 이론이 삶을 경제로 축소시켜”

필리핀의 철학자이자 경제·개발 연구자인 셔리토 사블은 세계화의 윤리적 함정이 불평등 확산에 기여했다고 말한다. 다른 지역에서도 빈곤 문제는 심각하다.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비참한 환경에서 절대적 결핍과 필요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서구의 기술 발전과 효과적인 국내 정책은 주요 산업국들의 생산성 향상을 이끌었다.

하지만 세계적인 진보가 모두에게 혜택을 준 것은 아니다. 개발도상국 사회는 취약한 정부, 부족한 인프라, 열악한 금융, 불공정한 세계 무역 정책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체 상태에 빠져 있다.

사블은 현대화 이론이 삶의 많은 측면을 경제로 환원시켰다고 지적하며 이는 인간의 자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세계 인구 중 7억명 이상이 하루 1.90달러 미만으로 생존하고 있으며 이 중 4억 1,300만 명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고 세계인구리뷰는 발표했다. 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인구의 42%가 여전히 절대 빈곤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세계은행은 2030년까지 전 세계 최빈층의 87%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집중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현대 사회와 인간 이성의 가장 큰 스캔들은 세계의 풍요로움과 기술적 진보 속에서도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수백만명의 빈곤층, 특히 여성과 어린이들의 공포와 명백한 고통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왜 가난할까? 빈곤에 대한 경험적 설명은 빈곤층이 자신의 상태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관찰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흔히 빈곤층을 악습이나 게으름, 무지 탓으로 돌린다. 그들은 마치 계획 없이 번식하는 토끼처럼 여겨지며 빈곤은 개인의 실패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의 문제점은 빈곤의 역사적, 구조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식민 지배의 어두운 과거, 문화적·정치적 폭력, 엘리트와 대중 간의 지배 관계는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를 고착화시키고 빈곤층이 국가 정책 설계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한다. 빈곤의 기능주의적 설명은 개발도상국 빈곤층의 후진적인 사고방식을 지적한다. 신뢰할 수 있는 경제·사회 기반 시설 부족이 국가의 빈곤 탈출 실패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 맥락에서 빈곤은 적응의 결과로 해석된다.

빈곤의 구조적 본질은 수백만명이 겪는 억압과 경제적 배제를 여실히 드러낸다. 오늘날의 세계 경제는 권력을 쥔 이들에 의해 결정되고 설계되며 이는 계층 구조의 최상위에 있는 자들의 이익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부유한 국가들은 빈국들이 따라야 할 ‘올바른 정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접근에서 정책 결정자들은 기술 이전과 해외 차관 확보를 경제적 진보와 번영을 달성하는 주요 수단으로 본다. 그러나 이 기능주의적 접근의 문제는 모든 것을 돈으로 축소시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세계화되고 시장 주도적인 경제 속에서 부유한 자들이 지닌 지배력과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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