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말이 넘쳐나는 시대다. 클릭 한 번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정보가 쏟아진다. 거친 대결, 가짜뉴스, 정쟁으로 얼룩진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각자의 주장이 강경해지다 보니 살벌하고, 타협의 길은 멀고 험하다. 내란 사태 이후 사법파동, 당내 쿠데타 논란 등 정치 혼란이 거듭되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동네 뒷산이라도 오르면 잠시나마 시끄러운 세상과 멀어진다. 자연에 귀 기울이는데 재미가 붙으면서 “알게 되면 참으로 보이나니(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라는 명언을 실감하고 있다. 숲의 존재를 알게 되니 궁금해지는 게 많아진다. 야생초, 나무, 곤충, 새 이름을 잘 아는 사람이 무척 부럽다.
산책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꽃, 나뭇잎을 사진으로 찍어 스마트폰에게 이름을 물어보기 일쑤다. 식물·동물도감을 수시로 뒤져보고, 유튜브 검색을 통해 ‘한국의 새 울음소리 모음’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 영상을 틈틈이 찾아본다. 자연을 잘 모르는 무식함이 통탄스러울 정도로 자꾸 들여다봐도 헷갈린다.
무심코 지나치던 식물 이름을 찬찬히 불러본다. 시인 김춘수의 ‘꽃’처럼 이름을 불러주니 존재 의미도 더 확연해진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참 아름다운 시구다.
산마루 초입부터 보이는 참나무의 경우 ‘참’이란 접두어가 왜 붙었을까? 농기구용으로 자주 사용했을 정도로 실생활과 밀접해 버릴 것 없는 ‘진짜’ ‘찐’ 나무란다. 참나무의 여러 수종 중에서 상수리, 굴참, 떡갈, 신갈, 갈참, 졸참 등 6가지는 ‘참나무 6형제’로 불린다.
나무껍질을 지붕 덮개나 코르크 마개로 삼고, 나뭇잎으로 떡을 싸거나 신발에 까는 등 무궁무진한 용도를 자랑한다. 참나무처럼 쓰임새가 이렇게 다종다양한 사람은 이제 없을 듯하다.
산길 멀리서 벚꽃처럼 보이는 화사한 때죽나무, 말 근육같이 나뭇결이 매끄러운 서어나무, 십자가나무로도 불리는 산딸나무, 짙은 향을 발산하는 잔가시 돋은 산초나무, 약재로 쓰이는 작살나무가 이제 눈에 쏙쏙 들어온다. 야산에서도 흔한 나무들인데도, 그간 분간을 잘 못했다.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발걸음 떼기가 싫어진다. 멧비둘기, 꾀꼬리, 딱따구리, 동고비, 개개비, 되지빠귀, 박새, 물까치, 직박구리, 딱새, 곤줄박이, 멧새 등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토종새다. 한번 눈에 들어오면 신기하고 귀엽기 그지없다.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조용히 10분 정도 기다려야 새와 친구가 될 수 있다. 이런 인내심이 있으면 휙휙 날아다니던 새들이 곁을 주며 다가온다. 망원렌즈 달린 카메라, 쌍안경을 들고 이 순간을 기다리다 앙증맞은 새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는 ‘생태’ 산책가가 의외로 많다. 필자는 요즘 텃새, 철새의 울음소리와 모양새를 가려내느라 끙끙댄다.
이런 묘미로 인해 점점 숲의 마력에 빨려든다. 다이애나 베르스퍼드 크로거라는 식물학자의 말처럼 “숲은 우리를 차분히 위로하는 ‘신’과 같은 존재”다.
숲의 위엄을 경험하면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자연에 시선을 집중하고, 귀 기울이면 자신 또한 변화하는 느낌이 든다. 차분해지고, 경이롭고, 감사의 마음이 커진다. 새소리, 꽃과 나무 향기가 또렷해지고 나무 사이로 반짝대는 햇살이 따사롭다.
소나무가 빽빽이 자라는 군락지에선 신발을 벗고 땅 기운과 교감하는 ‘어싱(Earthing)’부터 해보자. 그리고 눈을 감고 선 자세로 몸을 턴다. 10~20분 진동 수련을 하다 보면 몸속의 탁기가 손끝, 발끝으로 빠져나가고 자연의 맑은 기운이 피부를 통해 스며든다. 기혈순환이 원활해지니 나무에서 뿜어나오는 피톤치드가 금새 마음과 몸을 진정시켜준다. 신성한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시간이다.
침묵이 동반되는 ‘듣기’ ‘보기’만으로도 자연의 힘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런 힘이 쌓여야 세상의 거친 소리 또한 다정하게 들리지 않을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윌든’에서 “나는 조용히 앉아 그곳의 깊은 침묵과 고요 속에서 내면의 메아리를 들었다”고 전해준다. 소음처럼 넘쳐나는 말, 쏟아지는 정보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숲에서 자연을 자주 경청하면 좋을 듯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