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한남동 관저에서 퇴거하던 날, 필자는 우연히 서울 종묘(宗廟)를 찾았다. 서울 도심 한복판의 다른 세상 같은 이질적인 공간이다. 조선시대 그 어떤 건축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곳이다.
바닥까지 덮을 듯하면서도 끝없이 펼쳐진 맞배지붕, 그 아래로 길게 늘어선 열주, 어둠을 깊게 드리운 월랑,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가슴높이의 광활한 월대….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오롯이 새겨진 건축물이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한국건축 미학의 최고봉이라 칭송하지만, 왕과 왕비 혼을 모신 죽음의 공간 또는 영혼의 공간인지라 궁궐만큼 선 듯 가보지 못했다. 그런데 종묘 정비공사를 마치고 4년 만에 베일을 벗는다기에 모처럼 방문하게 됐다.
종묘 핵심 건물인 정전의 목재 충해, 보 처짐 등 건축물 구조 보수공사를 마치고 공사 가림막을 완전히 거둬낸 뜻깊은 날이었다. 오는 20일 왕과 왕비 신주(神主)를 다시 모셔오는 환안제 겸 준공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다.
종묘가 장엄한 자태를 드러낸 시간에 한남동에선 탄핵당한 대통령이 낯 뜨거운 행동을 보였다. 헌법재판관 전원 일치의 ‘대통령 파면’ 판결을 아랑곳하지 않고, 비상계엄에 따른 나라 혼란에 대해 어떤 반성이나 자숙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개선장군이 된 듯 한남동 관저를 걸어 나오며 미소를 띤 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었고, 청년들에게 다가가 악수했다. 이어 한 학생과 포옹한 뒤 지지자가 건넨 빨간 모자를 받아쓰고 차에 올라 서초동 사저로 향했다.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한 지 일주일 만에 대중 앞에 이렇게 나타났다. 그리곤 법률대리인단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나라와 국민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겠다”고 전했다.
‘새로운 길’이 뭔지 모르겠으나 그가 종묘에 와 보면 최소한 ‘국민을 위한 길’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엔 조선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그렇지만 왕위를 계승한 27명의 왕 가운데 광해군과 연산군 두 명의 신주만은 종묘에 들어오지 못했다.
폭정과 사치를 거듭해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기고, 주색에 빠진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위됐다. 31세 젊은 나이로 숨진 지역인 강화도 교동도 유배지엔 터와 돌기둥만 남아 그저 황량할 뿐이다.
광해군도 초기엔 개혁 군주였으나 잦은 옥사에다 폐모살제(廢母殺弟·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 죄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종묘를 재건한 임금인데도 정작 자신의 신주를 안치시키지 못했다.
종묘는 단순히 왕의 신주를 모시는 신전이 아니라 왕의 업적과 통치를 평가하는 공간이다. 신주 옆에는 업적을 새긴 금책, 옥책과 후세 교훈담, 활동 문서가 비치돼 있다.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시면서 그들이 남긴 공을 찬양하는 신실이 꾸며져 있는 것이다.
업적과 공덕을 인정받아 영원토록 정전에 모셔지는 왕의 신주를 ‘불천지주’로 부른다. 태조를 비롯한 태종, 세종, 정조 등 치적의 역사를 남긴 왕들이다. 정종, 문종, 단종, 예종 등 재위 기간이 짧고 업적이 적은 왕들은 영녕전에 봉안됐다.
이처럼 대부분의 조선 왕 신주는 종묘 내 두 건물에 안치됐는데, 폭군으로 단죄된 두 왕의 신주는 거부당했다. 이는 조선 개국 정신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는 궁궐과 도성을 건설하기 전 먼저 종묘와 사직단부터 지었다.
경복궁 오른쪽에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신 사직(社稷)을, 왼쪽에 왕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인 종묘를 각각 세웠다. 백성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경제의 신’과 나라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정치(조상)의 신’을 왕의 거처인 궁궐보다 먼저 챙긴 것이다.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종묘사직을 잘 지켜야 한다”라는 대사에 담긴 심오한 뜻을 종묘에서 제대로 알았다.
종묘는 그리스 파르테논, 로마 판테온, 중국 천단, 일본 이세신궁에 비견될 만큼 뛰어난 신전이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을 설계한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종묘를 방문해 “세계 어디에서도 이토록 장엄한 공간을 찾을 수 없다”고 감탄했다.
왕조시대는 아니어도 종묘에서 한국의 저력을 느끼게 됐다. 그 진수를 실감하려면 매년 5월 첫째 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에 펼쳐질 종묘대제를 관람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