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겸 동국대 법학과 교수
최근 1987년 체제가 문제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돌아다니고 있다. 1987년은 우리나라가 오랜 권위정부의 시대를 마감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주 내용으로 하는 헌법을 개정했던 해이다. 당시 국민은 국가의 대표인 대통령만 선거로 직접 선출하면 국가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알았다. 물론 대통령 직선제가 모든 사회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여러 번의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눈부시게 발전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경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진 정치의 발전을 기대했다. 그런데 정치활동의 중심에 있는 국회는 ‘폭력국회’ ‘식물국회’ ‘방탄국회’ 등 다양한 별칭을 얻기만 하고 정치의 선진화를 견인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국회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소위 국회선진화법이라 불렸던 개정 국회법도 국회를 선진화하지 못했다.
21세기가 오면서 국가 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국가 간의 총력전이 전개되고 있는 시대에 정치의 후진성은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는 지구상에 발전하지 못하고 혼란 속에 있는 소위 후진국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선진국과 후진국의 경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한때는 경제적 선진국이었던 국가가 정치의 후진성으로 이제는 후진국이 돼 있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는 경제의 발전에 정치가 뒷받침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국력이 후퇴하면서 후진국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외형적으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국가 경제의 규모, 한류라는 트렌드로 문화의 세계화, 국민교육의 수준, 국민 생활의 발전과 사회기본시설의 구축 등 선진국이라 불릴 수 있는 조건을 거의 갖추고 있다.
이렇게 국가와 사회가 발전하고 있지만, 유독 선진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국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이다. 국가의 발전과 안정에 정치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정치를 통해 국가의 정책이 수립되고 입법을 통해 지원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제대로 추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의 후진성으로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면 국가작용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으로 돌아가면서 국가발전을 저해하게 된다.
1987년 개정헌법은 국민의 기본권 조항을 위시해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헌법이었다. 아니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국가권력에서 대통령의 권한만 제대로 견제할 수 있으면 권력분립원칙이 제대로 작동할 줄 알았다. 그런데 총선이 거듭되고 국회의 다수당 의석이 과반을 훌쩍 넘어 입법을 장악하게 되면서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보다 제왕적 입법부의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입법부인 국회는 법률제정권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부, 사법부 등 국가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국회가 이런 견제 권한을 오·남용하게 되면 권력분립원칙은 무너지고 법치주의도 붕괴하는 것이다. 법치주의는 헌법에 합치하는 정당한 법률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입법부인 국회가 정당하게 입법권을 행사해 법률을 제정하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국민의 자기지배적 정치원리이다. 국민이 직접 국정을 운영할 수 없어서, 우리나라는 헌법에 따라 대의제민주주의를 채택해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헌법은 주권이 국민에 있고 모든 국가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여 이를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는 것일 뿐이다.
헌법은 여러 곳에서 국가권력에 헌법과 법률을 준수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헌법은 민주적 정당성을 국민으로부터 직접 부여받지 못한 사법부와 헌법재판소에 대해서는 헌법과 법률 및 법적 양심에 따라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행정부에 대해서는 헌법과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고 법치행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재판작용과 행정작용은 헌법과 법률을 위배해서는 안 된다.
최근 공직자범죄수사처는 대통령 체포와 관련하여 법을 위반한 것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영장발부와 관련해 법원의 위법도 의심받고 있다. 더구나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헌법재판소법을 위반했다. 이를 견제해야 할 국회는 침묵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법치는 무너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