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살아오면서 비상계엄을 네 번 겪었다. 갓난아이와 어릴 적 계엄이 무엇인지 모른 채 지나쳤고, 세 번째는 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때 눈앞에서 맞닥트렸다. 그때 ‘신현악(새로 나타난 악)’ ‘전두악(악의 최고 두목)’이 광주 ‘피의 참사’ 배후라는 뜬 소문을 들었다.
신현확 국무총리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빗댄 말이었다. 시위가 끊이지 않던 암울한 대학 시절을 보내다 은밀히 유포되던 광주시민 학살 장면을 담은 비디오 영상을 보니 치가 떨렸다.
이번의 네 번째 계엄은 너무 어처구니없다. 12.3 계엄사태 이후 시간이 멈춘 듯하다. 군부독재 유전자를 끊어내지 못해 ‘구시대 마지노선’을 넘지 못한 것인가. 우리 사회에 대중, 군중만 있을 뿐이고 민중과 민주는 사라진 모습이다.
공연장에서 들던 야광봉이 1개월 넘게 거리에 넘쳐나고, 반대편엔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손에 흔들며 하나님 나라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미국에선 “왜 한국인이 성조기를 드냐”며 의아해한다.
이들이 어쩌면 분노조절장애에 휩싸여 마지노선을 넘을 수도 있다. 모두 나라를 구하려 한다고들 하지만 어쩌면 ‘악의 평범성’에 불과한 현대판 아이히만 후예 역할을 할지 모른다.
양비론 차원에서 비난만 하려고 악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다. 1987년 6월 국민항쟁과 촛불혁명을 민중이 이끌었어도 결국 정치적 과실을 누린 건 권력자였다.
필자가 6월 항쟁에 가세했을 때 백골단은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직격으로 날아오는 최루탄이 서울역사 유리창 문을 뚫고 들어오자 민중들은 혼비백산했다. 그들과 함께 철로를 통해 도망쳐 빠져나오다 백골단 군화 발길질에 채인 새끼손가락 마디가 뒤틀려 여전히 삐뚤어진 상태다.
또 서울 구로구청에서 부정선거 증거물로 탈취한 대통령선거 투표함을 지키고 있을 때도 백골단이 번뜩이는 헬멧을 쓰고 나타났다. 독재를 끊어내야 할 때 민중이 늘 들고 일어섰지만, 더는 광대놀음만 해서 안 된다는 생각이다.
일상을 들여다보면 악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빛깔로 존재한다. 악은 다름 아닌 자기만이 옳다는 절대적 믿음 같은 것이다. 범죄 스릴러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역설적으로 악보다 더한 압도적인 힘으로 악을 응징한다. 악이 불쌍해 보일 정도다. 영악한 사람들은 ‘신의 말씀’으로 악을 포장한다. 힘없는 악마는 없다. 힘이 없으면 악마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
분노는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권력욕에서 비롯되는 분노가 오랜 시간 쌓이고 쌓일수록 폭발력이 강해진다. 시공 속에서 축적된 양과 비례해 비등점을 넘으면 사회 전체를 아마겟돈 상황으로 몰아간다. 분노 에너지를 쏟아낸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함을 되찾는 역사가 반복돼 왔다. 다시 폭발할 그날을 기다리면서.
19세기 말 프랑스 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귀스타브 르몽은 “현명한 존재는 무리에 섞이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독일 통일의 전기를 마련한 보불전쟁(1870~71년) 이후 모든 국가에서 군중세력이 빠르게 성장하리라 예견했다. “개인이 군중 속에 편입되면 개성과 인격을 소멸하고, 감정과 사유가 한쪽으로 쏠리는 편향 현상이 심각해질 것”이라고 의사로서 예리한 진단도 내렸다.
군중의 속성은 충동성과 변덕이 심하고 자극을 받으면 쉽게 격분한다. 정치판엔 거짓이 난무하고, 가짜 뉴스를 반복해 널리 전파하기 쉽다. 군중은 머리가 아닌 심장을 따르기 마련이다. 논리보다 단순한 형태의 이미지에 이끌려 목소리만 커진다. 요즘 너무 익숙한 모습이다.
양편으로 갈라선 민중 혹은 군중들이 ‘성전’을 치르고 있는 사이 코스피 전광판 위 반짝이는 숫자가 한국의 위상을 보여준다. ‘주왕(酒王)’과 ‘희빈(喜嬪)’을 끌어내린다고 코스피 내리막 숫자가 쉽사리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일론 머스크 같은 자본가들은 “과학기술이 인류 평화와 번영,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확언한다. 효율과 효능만을 추구하는 기술지상주의는 민중의 삶을 챙기지 않는 권력자와 다르지 않다.
소수가 권력과 정보 네트워크를 독점하면 그건 ‘악마 사회’다. 강력한 자정장치 없이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중앙으로만 쏠리면 독재와 다름없다. ‘돈이면 왕이 되는 세상’과 같은 자본의 중력장이 힘을 못 쓰고, 군중 아닌 민중이 세상의 중심이 돼야 민주주의 위기론이 수그러들 것이다.
동시대인들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지만 사는 시간은 각기 다르다. 어떤 이들은 어제와 같은 오늘에서, 어떤 이들은 오늘의 끝에서 내일을 향해 산다. 12.3 마지노선부터 빨리 넘어서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