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경기 양평의 두물머리(남한강과 북한강 접경지)와 가까운 마을의 한 집엔 장독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산자락 아래 널찍한 마당에 제법 큰 항아리 1000여개가 올망졸망 모여 있다. 먼 산을 향해 늘어선 ‘단지형’ 장독대가 여간 탐스러운 게 아니다.

양평 장독대 안엔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보물이 들어있다. 인근 산과 들에서 캔 잡초 위주의 ‘백초(100가지 야생초)’가 수십 년째 발효‧숙성 중이다. 항아리 속 발효액이 한자리에서 30년 넘게 햇빛, 바람, 비, 눈을 맞고 있다. ‘B~ 30년’ 고급 양주처럼 ‘양평 발효 30년산’인 셈이다.

필자는 10여년 전 양평 장독대를 처음 취재한 이래 항아리 속 물질이 자연과 교감 나누는 숙성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효소 가공식품회사인 일본의 ‘만다발효’ 관계자가 양평까지 찾아와 거액을 제시하며 발효액을 사들이려 한 적도 있었다. 주인 A씨는 발효 종주국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일본 회사 측 제안을 뿌리쳤다.

필자는 그의 자긍심, 한국 발효에 대한 ‘찐’ 사랑에 반해 10년 넘게 흠모하고 있다. 또 그의 ‘발효 특강’을 틈틈이 경청하면서 오묘하기 그지없는 발효와 과학적 효능을 알아가고 있다.

요즘의 어수선한 시국 속에 개인적으로 풀리지 않는 일이 겹치는 상황인지라 답답한 가슴을 풀어볼 겸 며칠 전 A씨를 찾아갔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가 최근 ‘한국 장담그기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한 소식도 있었다.

한국인의 밥상을 지켜온 기본양념 ‘장’에 대해 세계가 드디어 극찬하기 시작한 건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유네스코는 “한국의 장담그기는 가족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가족 구성원 간의 연대를 촉진한다. 공동체의 평화와 소속감을 조성한다”고 평가했다.

발효 식품의 가치는 이보다 훨씬 심오하다. 세계적인 식품학자 마이클 폴라는 “한국 장담그기는 단순한 식품 제조과정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공생 과학이자 예술”이라고 칭송했다.

지역마다 다른 기후와 미생물에 따라 장맛 또한 달라진다. 차고 건조한 곳에선 감칠맛, 따스하고 습한 지역에선 풍부한 미감을 느끼게 해 준다. 서울대 등 여러 기관의 분석 결과 발효 과정을 통해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이 분해된 뒤 아미노산에 이어 면역물질이 생성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음식물을 섭취해 12시간 소화되는 과정을 추적해보면 마치 항아리에서 장류가 발효‧숙성되는 모습과 흡사하다. 위장, 소장, 대장 같은 소화기가 ‘몸 안의 항아리’라면, 항아리는 ‘몸 밖의 소화기’ 같은 역할을 한다. 소화기와 항아리는 유기물을 물리적으로 파쇄한 뒤 미생물과 효소의 힘을 빌려 발효시키는 화학작용을 한다.

입으로 들어온 음식물은 가장 먼저 저작을 통해 침샘과 뒤섞여 잘게 부서진다. 이어 위, 십이지장, 소장, 대장을 거치는 동안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원소가 더 잘게 분해된다. 이들 원소가 뒤섞여 새로운 물질로 변환해 피와 영양소로 공급되는 덕분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몸 밖에서의 발효 과정은 장기 속 12시간의 소화 과정보다 더 길어야 하고, 숙성 기간은 해를 거듭할수록 좋다고들 한다. 그래서 오래된 발효액은 몸으로 바로 흡수되는 영양분이자 에너지원이기에 귀히 여겨진다.

모든 생명은 물리와 화학 반응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발효 과정을 통해 독소조차 분해하면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낸다. 이들이 고맙게도 항바이러스, 항산화, 항염 역할을 하며 면역력을 든든히 지켜주고 있는 거 아닌가.

인간 사회도 이런 식으로 발효되면 좋은데, 부패하고 섞어간다는 불안감이 높다. 인류는 씨족, 부족 같은 소집단에서 민족, 국가집단으로 커지며 과학기술 진보를 이룩했다.

동시에 이기적인 측면 또한 너무 강해졌다. 인류 공동체보다는 내 민족과 국가 이익이 먼저이다 보니 문명 진화가 멈춰버린 듯하다. 서로 협력해 평화롭게 잘 살아가야 하는데 기후위기 등 단말마적 심판을 받을 지경에 이르게 됐다.

한국은 그래도 발효 종주국다운 면모가 출중하다. 상식을 벗어난 계엄사태가 발생하자 순식간에 민중들이 국회로 모여들어 ‘정의로운 결론’을 내리도록 힘을 모았다.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은 때, 땅, 사람을 역사의 3대 요소로 꼽았다. 발효된 민중이 역사 주체로 나서고 있으니 요즘의 불안한 ‘시공’을 극복해 나갈 것 같다.

A씨는 장독대에서 숙성되는 물질을 “인류가 만들어낸 보물 중 보물”이라며 ‘우주 발효액’이라 부른다.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극한 친환경 발효 식품은 최소 자원으로 최대 영양가를 발휘하기에 지속 가능한 미래 식량 시스템을 이끌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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