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관객 ‘서울의 봄’, 비상계엄 사태 이후 다시 화제
올해 관점을 달리한 ‘가족’ 주제의 영화 잇달아 개봉
동성 사실혼 피부양자 인정과 맞물려 새 감각 선사

[천지일보=홍수영 기자] 혹자는 얘기한다. ‘예술’의 기능에는 시대를 보존하는 것도 있다고 말이다. 또 예술은 그 보존된 시대를 함께 바라보며 소통과 공감을 나눌 수 있는 매개체가 될지도 모른다. 2024년 한국 영화는 잊고 지냈던 역사의 한복판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기도 하고, 놓치고 있던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12.12 군사 반란을 소재로 한 천만 영화 ‘서울의 봄’이 올해 열린 제45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뿐만 아니라 남우주연상(황정민), 편집상, 최다관객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하며 또 다른 천만 영화 ‘파묘’와 나란히 4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을 막으려는 얼마간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26일 암살당한 직후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정국을 장악하다가 끝내 반란까지 하는 내용이 실감 나게 재연되는 영화다.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계엄 상황의 엄중함과 군사 쿠데타의 야만성을 되새기기도 하고, 새롭게 깨닫기도 했다.
그런데 수상 소감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소식이 국민을 강타했다. 계엄 발생 45년 만에, 그것도 마지막 계엄의 상황을 그렸던 영화가 천만 관객이 들고 최고상을 받은 올해에 계엄이 다시 선포된 것이다.

이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서울의 봄’ 언급량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계엄 해제 당일 엑스(X, 옛 트위터)의 실시간 트렌드엔 ‘서울의 봄’이 등장해 10위권을 오르내렸다. 그 과정에서 5만건 이상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재게시가 활발한 게시물의 경우 조회수 100만회를 우습게 웃돌았다. 그런 게시물이 수십·수백건에 이르렀다.
많은 수의 글이 ‘서울의 봄을 진짜로 체험할 줄은 몰랐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그저 영화 속 이야기, 과거의 이야기로만 그칠 수 있었던 내용이 현실로 펼쳐졌다는 점에서 많은 이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계엄의 현실화를 목격한 지금 이 영화는 일종의 역사서이면서도 동시에 예언서, 예방주사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일각에서 ‘프로파간다(propaganda)’ 영화 취급을 하던 또 하나의 천만 영화가 올해 있었다. 청룡영화상에서 나란히 4관왕을 한 또 다른 영화였던 ‘파묘’가 그 주인공이다.
영화의 배경은 현대 한국이지만, 일본 귀신을 등장시키면서 ‘파묘’는 일제강점기를 다시 2024년에 소환했다.

물론 영화 속 여러 가지 장치를 볼 때 ‘파묘’는 일정의 의도를 갖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나 친일파 조상 등의 이야기를 활용한 방식에서도 그런 점이 드러난다.
특히 이 영화의 결말은 우리 사회에 아직 박혀 있는 ‘친일파’를 뽑아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의견이 많다. ‘쇠말뚝’이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비유됐는지를 곱씹으면 동의할만한 해석이다.
그런데 두 영화 모두 특정 집단에게 정치적 이득을 주기 위한 영화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된 바 있다. 소위 ‘좌파 영화’라는 것이다. ‘파묘’의 경우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이 “좌파가 집결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 ‘서울의 봄’은 역설적으로 군인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을 다룬다는 점에서 전통적 보수 색채를 띤 영화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위기에서 국가를 구해낼 때 이런 군인의 충정보다는 시민의 연대 등을 더 강조하는 게 통상적인 진보 색채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1987’이 그런 대표적 영화가 되겠다.
영국의 대표적인 진보 영화인이라 할 만한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또한 연대 의식을 강조한다.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대표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최신작이자 은퇴작이라 할 수 있는 올해 개봉작 ‘나의 올드 오크’가 다 이런 식이다.
‘서울의 봄’은 오히려 서울의 봄이란 제목을 쓰고도 시민은 지우고 군인들의 이야기로만 구성했다는 점을 비판받아야 할지 모른다.
‘파묘’는 ‘서울의 봄’보다야 성향에 대한 의심을 할 수도 있다고 보이지만, 이 역시 조금 우스운 상황이다. ‘건국전쟁’의 주인공인 이승만 전 대통령은 독립운동가였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을 표하면서 ‘항일’을 뺀다는 것은 정말 모순적이라 할 만하다. 이 논란은 2024년 한국 현실의 아이러니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흔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7월 18일 사실혼 관계인 동성 배우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다는 내용의 판결을 내놨다. 소성욱씨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료 부과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확정한 것이다.
대법원은 “피부양자 제도의 본질에 입각하면 동성 동반자를 사실상 혼인 관계에 있는 사람과 달리 취급할 이유가 없다”며 “국민건강보험법령에서 동성 동반자를 피부양자에서 배제하는 명시적 규정이 없는데도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제하는 것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두고 AFP통신은 “역사적 승리”라고 평가했다. 아직 동성혼이 법제화된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의미 있는 진전이라는 게 외신의 전반적인 평가다.
이런 특별한 가족의 형태를 반영하듯 올해 한국 영화에선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가 아닌 가족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가족을 내세운 영화·드라마가 유독 많았던 올해 ‘럭키 아파트’는 함께 살고 있는데도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조망한다. 동성 커플인 선우(손수현)와 희서(박가영)는 동거 중이다. 그런데 아랫집에서 악취가 올라오면서 이들 일상에 문제가 생긴다. 자기들끼리도 다투고 주민들과도 충돌하면서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특히 아랫집에서 나는 냄새의 이유가 혼자 살던 아랫집 주인의 고독사였고, 그가 선우와 같은 레즈비언이었단 점에서 선우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된다.

‘대도시의 사랑법’도 남들에게 쉬쉬하는 가족 조합이 등장한다. 동성애자 남자인 흥수(노상현)는 ‘베스트 프렌드’가 된 이성애자 여자 재희(김고은)의 집에서 함께 산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상처 입는 두 사람이 한집에서 지내며 서로를 보듬는 것이다. 물론 둘의 성적 취향이 다르므로 ‘연인과의 동거’랑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이 독특한 가족 형태를 이해하지 못해 영화 내에서 폭력 등의 문제가 불거지기도 한다.
이 영화들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았거나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다른 유형의 가족 형태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형태의 가족이 받는 위험은 언제든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시사해준다.
역시 동성 연인이 등장하는 영화 ‘딸에 대하여’도 남의 일이 우리 일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힘없는 치매 노인이 요양병원에 옮겨지는 상황과 딸이 동성 연인과 함께 집에 들어오는 상황이 겹치며 주인공이 ‘소수자’가 되는 일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장손’ ‘그녀에게’ 등의 영화가 가족을 주제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펼쳐 호평받았다.
예술의 다른 기능을 꼽자면 이처럼 관객의 세계를 확장해준다는 점도 있겠다. 이렇게 올해 한국 영화는 현실과 조응하며 현실의 거울이 되기도 하고 안경이 되기도 하며 관객의 지평을 넓혔다. 흔히 ‘볼 영화가 없다’고 하지만, 찾아보면 새롭게 발견될 영화는 분명히 있다. 자신의 취향은 맞닥뜨리지 않고는 확인할 수 없다. 경험하지 않고는 무엇을 좋아하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술은 이에 대한 길라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 영화 ‘서울의 봄’,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 수상… 황정민 남우주연상 포함 3관왕
- [컬처세상] 영화 ‘서울의 봄’이 현실로… 그물에 걸린 윤석열
- [피플&포커스] 한강은 어떻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나
- [피플&포커스] 김금단 비젼아이 대표 “창의적인 방과후학교로 아이들 ‘꿈’ 키워요”
- [피플&포커스] 트럼프에 명함 던진 틱톡 크리에이터 ‘미인’… ‘280만 팔로워’ 함께 성공 여정
- [피플&포커스] 이만적 이사장 “삼청교육대, 사라지지 않는 1980년의 상처와 공포”
- [피플&포커스] “크리스마스에 진짜 예수님이 탄생하셨을까?”… 크리스마스, 종교적 기원에서 글로벌 축제로
- [피플&포커스] ‘경제정책과 동고동락’ 구윤철 서울대 특임교수 “정치와 경제, 분리해야”
- [피플&포커스] 김경은 동명텔레콤 대표 “돈보다 사람, 이윤보다 상생… 직원·지역과 동반 성장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