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사연구소 심포지엄, 103위 성인·124위 복자 연구
[천지일보=정현경 기자] 한국천주교회에는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가 있다. 이들 19세기 조선교회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과정과 그들의 삶의 특징, 영성 등을 고찰해보고 이들의 죽음이 당시의 역사발전과 오늘날 미치는 긍정적 의미를 나누는 시간이 마련됐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산하 한국교회사연구소는 ‘한국 순교자 시성·시복과 순교자 연구’를 주제로 2014 심포지엄을 7일 오후 명동주교좌성당 교육관에서 개최했다. 이날 발제는 윤민구(손골성지) 신부가 제1주제 ‘103위 순교자 시복·시성 과정에 대한 종합적 연구’,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박사가 제2주제 ‘하느님의 종 124위 선정 과정과 시복 자료 정리에 관한 연구’, 강석진(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신부가 제3주제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발표했다. 이후 조광(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의 사회로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토론에는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류한영(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신부, 노길명(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함께했다.
한국천주교회의 103위 성인 시성식과 124위 복자 시복식은 모두 로마 바티칸이 아닌 한국 땅에서 이뤄졌다는 특징이 있다. 시성식은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이뤄졌고, 시복식은 올해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재 하에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치러졌다. 특히 124위 시복수속은 과정 전체를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해 의미가 크다.
윤민구 신부와 차기진 박사는 시복·시성 과정에 대한 내용을 부족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발표했다. 강석진 신부는 이번에 시복된 124명의 조선 후기 순교자들이 보여준 믿음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 발표했다.
강 신부는 “그들은 신앙 안에서 희망의 삶을 살았다. 매순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갈망을 간직하며 살았고, 천국이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봤다”면서 “순교는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자신이 겪는 박해 상황을 예수의 삶을 본받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또 “그러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현실에 충실했다. 박해 중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주변 이웃들과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았고, 교우촌에서는 신분이나 남녀의 차별 없이 하느님 안에서 동등하게 고귀한 존재로 여겼다”고 말했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산 속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생활방식을 유지했다. 이 때문에 당국은 이들이 ‘통화(通貨)’와 ‘통색(通色)’을 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로 간주했다. 게다가 동정관(童貞觀)의 개념과 함께 ‘여성 신앙 공동체’가 생겨 결혼하지 않는 여자가 늘자 유교적 가족질서를 붕괴시키는 무리로 인식하게 됐다.
강 신부는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자발적으로 실천하면서 불합리한 유교적 신분질서나 남녀차별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것을 믿었다”며 “천주교 신자들이 보여준 서학 수용의 논리와 실천적 행동은 조선이라는 봉건사회의 해체와 함께 새로운 사회 질서를 추구하는 인식의 기초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19세기 조선교회는 성리학적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해 지배계층에서는 처음부터 천주교를 ‘척사위정’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100여 년 동안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사형수로 처형했다”면서 “그러나 오늘날 그들의 시복시성을 통해 우리는 그들을 훌륭한 신앙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좋은 귀감이 된다”고 마무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