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척의 배로 당시 동양 최고의 장수 구루지마가 이끄는 330척의 왜군을 격파시킨 명량대첩은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해전이요 기적이요 불가사의한 일이라 해도 무방하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장군이 지인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곡창지대인 호남이 뚫리면 나라의 명줄이 끊긴다는 사실을 잘 아는 장군은 부하들과 울돌목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왜군과 싸워 이겼다. 나라는 장군을 버렸지만, 장군은 나라를 구했다. 임금은 물론 조종대신들은 당리당략에 물들어 나라와 백성들의 안위보다 자신들의 권력과 명예와 밥줄이 더 소중하던 시절이었다.
임금은 무능과 함께 측근의 소리에 귀가 막혔고, 백성의 소리와 충신의 소리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가 되었으며, 오직 내 앞길을 막는 방해꾼이요 잡음일 뿐이었다.
이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신뢰’라는 말이 귀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신뢰라는 단어는 지난날 대선에 임한 박근혜 후보의 아이콘이었다. 신뢰와 함께 또 하나의 아이콘이 있었다면 ‘불통’이었다. 이 때 국민들은 불통이라는 부정적 측면보다 신뢰라는 긍정적 측면에 점수를 주며 대선에서 승리를 안겼다. 그리고 그 신뢰는 깜깜한 세상에 국민들의 작은 등불이자 희망이기도 했다. 하지만 희망과 등불이던 신뢰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불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아가 그 불신은 신뢰가 아닌 현 정부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어느 순간 변해버린 이 같은 현상을 두고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 하던가. 어쩌면 갑자기 변한 게 아니라 실상은 불신이 근본이었음에도 국민들이 무지해 분별력을 잃었었는지 모를 일이다.
더듬어 볼 것은 지난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지울 수 없는 끔찍한 세월호 사고, 하지만 세월호는 사라지고 그로 인한 구원파와 그 실세 유병언 전 회장과 관련한 수많은 얘기만 온 나라를 가득 채웠다, 억측이 또 다른 억측을 낳으며 그야말로 대한민국 정부의 신뢰는 바닥을 치고 있다. 검경수사 발표와 국과수에 의해 DNA검사와 두 번째 손가락과 치아를 증거로 유 전 회장의 시신임을 증명해 발표해도 국민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근래에 와선 국정원 개입설까지 나옴으로 불신의 늪은 깊어만 가니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하기까지 하다. 세월호와 함께 대한민국호가 침몰한 바로 이 자리 진도해협, 그 지근거리에 있는 울돌목에선 500여 년 전,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로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다는 사실이 왠지 여운을 남기며 오버랩 되고 있다.
영화 ‘명량’을 통해 살펴봤듯이, 암울한 시대를 맞을 때는 그 이면에 측근과 당쟁이 극에 달했고, 그로 인해 백성과 충신의 소리에 귀를 막았으며, 그 결과는 늘 백성들을 외세의 말발굽 아래 신음하게 했으니 지난 역사가 증명한다.
지난 월드컵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있었다.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 선수와 감독’, 타이틀이 말하듯이 국민과 국가를 대표하는 조직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조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돈과 명예와 인기로 인해 눈이 멀고 교만해져 본분을 망각하고 국가 대표조직을 개인의 의리를 자랑하는 사조직화 함으로써, 결국 나라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국민들을 분노케 한 사실을 분명히 목도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100일이 지났어도 대한민국은 변한 게 없다. 오히려 유병언과 세월호를 맞바꾸려 하고 있으며, 어떻게 덮을까, 어떻게 감출까, 어떻게 넘어갈까에만 여념이 없어 보인다. 세월호는 바로 우리 자신이었으며, 그러하기에 세월호는 절대 세월과 함께 또 다시 가라앉혀선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세월호 사건은 관련 희생자들과 유가족과 기타 관련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화상이기에 반드시 그 원인과 과정과 현실을 정확히 밝힌 후, 그 터 위에 거듭나는 나라와 국민이 돼야만 한다.
구한말의 역사가 안전(眼前)에 재연되는 이 때, 지정학적 위치로 다시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새삼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럴 때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삼는 슬기로운 민족으로 다시 나야 한다.
다시 찾아 온 위기의 대한민국호, 측근과 의리의 역할로는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이 나라를 구할 수 없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장수와 그와 함께할 12척의 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량’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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