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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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외교적으로 관여할 기회를 잡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외교에 초점을 맞춘 매우 명쾌한 정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 대화할지 여부는 북한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이 발언은 지난 주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영국에서 던진 평양을 향한 바이든 정부의 대북 메시지이다. 출범 4개월여 만에 평양에 던지는 백악관의 메시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워싱턴이 아닌 영국에서 발표됐다. 2018년부터 대미 대남 정책에서 여러 기회가 주어졌지만 좌왕우왕하던 북한은 이제 강력한 바이든 정부를 상대해야 하는 새로운 만리장성 앞에 서게 됐다. 지난 주, 영국에서 G7 외교개발장관회의가 열렸고, 정의용 장관과 블링컨 장관을 비롯해 세계 각국 외교 수장들이 런던으로 모여들었고 미국은 이 자리에서 막 검토를 끝낸 자신들의 대북정책을 공유하고, 북핵 대응에 대한 국제사회의 논의를 주도했다.

특히, 미국은 영국에서 연 각종 양자·다자회담에서 북핵 문제를 논의했는데 회담마다 ‘비핵화’ 과제에 대한 표현을 조금씩 달리했다. 그 표현들의 행간을 분석하면 바이든 정부의 전략이 조금 더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선, 한미 외교장관 회담에선 북핵 문제에 대해 ‘한반도의 비핵화’가 한미 공동의 안보 목표라고 명시하면서 일본을 포함한 3국 회담에선 ‘한반도의 비핵화’와 함께 문구가 덧붙여졌다.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 결의의 완전한 이행이 중요하다는 데 한미일 3국이 동의했다고 발표한 대목도 주목을 끈다. G7 외교장관들, 그러니까 미국과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이 참여한 공동성명에선 표현에 또 다른 차이가 있다. 총 87개 항으로 이뤄진 공동성명 중, 북한에 대한 내용은 19항과 20항에 담겨 있다.

우선 비핵화에 대해선, ‘북한의 불법적인 대량파괴무기와 탄도미사일에 대한 표현이 강경하게 드러났다. 즉 완전하고(complete), 검증 가능하며(verifiable) 불가역적인(irreversible) 포기(abandonment)’를 위해 전념한다고 못 박았다. 동시에 북한의 인권 문제를 별도 단락으로 나눠 국경폐쇄로 인한 주민의 고통과 정치범 수용소 문제와 납치자 문제 등에 대한 우려를 분명하게 표했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무겁게 다룬 것은 아직도 국제사회가 평양정권에 대해 불신이 크며, 동시에 북한 정권이 주민들의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전혀 노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국제사회의 우려와 질책이 보여주는 함의는 간단하다.

우선 한국이 참여한 회의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사용된 건, 한국 정부의 의견에 미국 측이 한 발 양보해 공감한 것이라는 게 외교부의 설명이다. 실제, 정의용 장관은 블링컨 장관이 한국에 온 지난 3월에도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왜 채택돼야 하는지 적극 설명한 적이 있다. 일종의 북한 유인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한미일 회담에서 북한에 대한 유엔 결의 이행을 강조한 것은 제재와 관련한 언급으로 분석되는 바 북한이 변화하지 않는 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암묵적 경고를 담은 것이다. 또, G7 성명에 북한 인권 문제를 자세히 기술한 건 이 문제에 바이든 행정부가 무게를 싣고 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 셈이다. 아울러, 비핵화와 관련해선 ‘CVID’라는 표현을 담지는 않았지만, 유엔안보리 결의에 따른 모든 불법무기를 ‘포기’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언급하며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동시에 북한에 대화의 길로 나올 여유도 보여주었다. 지난달 미국이 새 대북정책 검토 결과를 전달하기 위해 북한에 접촉을 시도했다고 알려졌는데, 북한은 여기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역시 북한의 중대한 실수다.

결국 문제는 북한이 2019년 ‘하노이 노딜’의 트라우마를 넘어설지에 달렸다는 것인데, 과연 북한이 초강대국 미국을 다루는 학습이 돼 있는지 우려가 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나서서 벌인 협상이 깨진 뒤, 북한으로서는 대미 대화를 재개하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감이 매우 커져 있다. ‘적대시 정책 철회’를 선조건으로 내걸며 가시 돋친 담화로 신경전을 걸어오는 것 역시 좌충수에 불과하다. 미국의 외교정책 전반이 북한을 살려두는 데 있지 않고 비핵화 하자는 건데 아직 김 국무위원장이 그걸 모른다면 ‘대미외교’란 말 자체를 버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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