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옛 선비들은 아름다운 강과 그윽한 경치면 누정(樓亭)을 지었다. 2층 형태의 난간을 두른 건물은 누각이라 부르고 벽이 없는 작은 규모의 아담한 건물은 정자라고 했다.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누정이 많아 누정문화의 보고라고 평가된다. 왜 이 같은 건축물을 많이 지었을까.
누정이 많이 등장한 것은 조선시대지만 그 역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지왕이 AD 488년 정월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서라벌 왕성 반월성 옆의 임해전(臨海殿)은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이었지만 큰 인공 연못을 만들고 물가에 2층 누각을 지었다. 지금도 경주 야간관광을 대표하는 임해전 달맞이 풍속은 1500년 역사의 시공을 이어주는 풍류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또 경주 왕성 부근에 월상루(月上樓)라는 누각이 있었다. 헌강왕은 이 누각에 올라 신라 도성의 풍경을 보며 민심을 살폈다. 왕은 나라의 태평을 축하하는 잔치를 임해전에서 베풀기도 했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울진군 월송정(月松亭)은 신라 화랑들이 경치를 즐기며 수련했다는 곳이다. 달과 소나무의 그윽한 정취가 좋아 ‘월국(越國)에서 가져다 심은 소나무’라고 경탄한 것은 운치의 소산이다.
이렇듯 누정의 이름들은 그냥 지어진 것이 없다. 자연사랑은 물론 선비들의 뜻과 이상이 함축돼 있다. 누정이 한국 역사 문화의 독특한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누정은 전통과 학문을 숭상하는 교육장이자 소통의 무대였다. 건축주는 있으나 누구나 출입이 자유로웠던 공유물이었다. 타 지역 누구라도 누정에 올라 자연을 완상하고 시를 지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모이면 문학 토론장이 되고 경사스런 날이면 축제의 장이 되었다. 학문을 숭상했던 사류들은 이른 봄부터 누정으로 모여 들었다. 금(琴)을 들고 소리를 즐겼으며 후학들을 모아 실력을 겨루게 했다.
자연에 은둔한 선비들이 모이면 현실 정치의 비판장이 되었다. 임진 전쟁 중에는 의병의 기치를 논의하던 구국의 장소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의지를 키우던 항왜(抗倭) 결사의 집회지가 되기도 했다.
한국 ‘정자문화 1번지’로 평가되는 곳이 경상남도 함양군 화림동(花林洞)이다. 이곳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남강에 이르기 전까지 기암기석이 어우러진 계곡으로 8담(潭) 8정(亭)으로 유명하다. ‘영남에서 빼어난 경치는 삼동(三洞.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이 최고이고, 삼동에서 가장 좋은 경관은 화림동’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다.
이곳에는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영귀정(泳歸亭), 동호정(東湖亭), 농월정(弄月亭) 모두 다섯 채의 오래된 누정이 있다. 고려시대 두문동 72현의 하나였던 전오륜(全五倫)의 후손들이 그 절의를 흠모하여 지은 거연정(居然亭)이 가장 아름답다. ‘자연에 내가 거(居)하고 내가 자연에 거(居)하니…’ 짧은 시귀 하나에 이 정자를 경영한 참뜻을 알 수 있다.
군자정은 퇴계 이황을 정점으로 하는 영남유학의 산실로서 무오사화에 희생당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선비정신을 흠모하여 지은 것이다. 농월정은 조선 중기 때 학자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傅)가 은거하면서 학문에 힘쓰고 벗들과 유유자적한 곳이다. 일찍이 실학자 박지원은 함양현감으로 있을 때 “서울 사람들이 무더운 여름날 화림동 계곡에 발 담그고 탁족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라더니 과연 알 수 있구나”라고 감탄했다.
함양 화림동 누정군은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지닌다. 한국의 누정을 연구해온 한학자 이갑규(李甲圭)씨는 누정을 가리켜 ‘한국의 혼’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누정은 소외되고 가치를 찾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누정들에 걸려 있는 현판 등 소중한 문화재를 도난으로부터 지키고 조사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지난 15일은 문화의 날이었다. 이 시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치를 찾는 일도 문화력을 키우는 일이다. 함양 화림동 누정군(樓亭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학계는 물론 군과 경상남도 문화재당국의 노력을 기대해 본다.
- [이재준 문화칼럼] 전쟁 종식 아리랑의 감동
- [이재준 문화칼럼] 눈물겨운 ‘초인종 의인’
- [이재준 문화칼럼] 문화의 달 국악의 감동
- [이재준 문화칼럼] 김영란 법 부작용 최소화해야
- [이재준 문화칼럼] 서라벌 지진
- [이재준 문화칼럼] 한가위 대보름달
- [이재준 문화칼럼] 병역세라니
- [이재준 문화칼럼] 아주머니 호칭 논란
- [이재준 문화칼럼] 나라를 흔든 그릇된 비선
- [이재준 문화칼럼] 백제 기와의 예술혼
- [이재준 문화칼럼] 국민 마음을 얻는 지도자
- [이재준 문화칼럼] 대학 동맹 휴업과 ‘공관(空館)’ 고사
- [이재준 문화칼럼] 잠룡(潛龍) 용어 청산과 시대정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