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좌우명’이란 늘 마음에 새겨 두고 자기를 경계하는 말이다. 2400년 전 제왕들의 스승이었던 공자의 좌우명은 무엇이었을까. 논어(論語)에 나오는 성인의 좌우명은 지금 읽어도 마음에 새길 내용이다.
- 제자 자공(子貢)이 물었다. ‘사람이 평생 실천할 만한 한마디 좌우명이 있습니까?’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사람들과 마음을 함께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행해지기를 원치 않는 일을 타인에게 행하지 마라.’ -

세종은 공자의 가르침을 소중히 생각하고 실천한 임금이다. ‘백성들과 마음을 함께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를 늘 생각하는 군주였다. 자나깨나 백성만을 생각하는 ’위민(爲民)’이 바로 세종의 좌우명이었다.

세종은 또 인사(人事)의 달인이었다. 명재상 황희는 본래 세종의 즉위를 앞장서서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장자승계의 원칙이 흔들리는 것을 태종에게 수차례 극간한다. 태종은 의지를 굽히지 않는 황희가 귀찮아 남원으로 귀양 보내기까지 했다.

그런데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제일 먼저 황희를 요직인 예조판서로 임명한다. 자신을 반대한 불충이었지만 원칙을 존중하고 넓은 식견과 도량을 지닌 인재였기 때문이다.

세종의 즉위로 죽음만을 기다리던 황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임금의 은혜에 감동하며 훌륭한 충신이자 신하로 남게 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세종시기만큼 훌륭한 인재들로 포진 한 사례는 없다. ‘인사를 만사’로 삼은 세종의 성공한 인테크였다.

한 나라의 제왕이 백성들의 신망을 잃고 무너지는 경우는 모두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때문이다. 고려 공민왕은 패륜적인 신돈을 기용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진다. 끝내는 정신이상자가 되어 자신을 시위하는 청년 무사집단(자제위; 子弟衛)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고려의 국운은 이 시기부터 급속도로 쇠퇴하여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마저 신돈의 아들이라는 풍문과 함께 무참히 살해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연산군은 올바른 소리를 외면하고 폭압정치로 일관하다 보위에서 쫓겨났다. 광해군도 이이첨이란 간신을 가까이 하여 민심을 잃었으며 끝내는 반정(反正)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한 많은 생을 살다 죽는다.

총명했던 광해가 이이첨을 가까이 한 것은 자신의 왕위옹립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가 교활한 성품인 것을 알면서도 인정상 내치지 못했다. 이이첨은 오만방자하여 인목대비까지 폐위시키는 패륜을 자행, 백성들의 원한을 샀다. 광해가 간신을 멀리하고 올바른 신하들을 등용하여 참된 소리를 들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선 왕조사회에서 두 번씩이나 왕을 바꾸는 반정(反正)이 가능했을까. ‘반(反)’은 어긋난 것을 바로잡아 정도(正道)를 회복한다는 뜻이다. 반정의 길을 열어준 것은 맹자다.

‘천명은 민의에 의한 것이며 민의에 의해 거부된 군주는 축출해도 된다’고 정의했다, 즉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바꿔도 된다’는 이론을 정립한 것이다.

지금 한국은 반정수준의 시민 촛불이 타고 있다. 고등학생들 심지어 가족의 손에 끌려 어린아이들까지 거리로 나오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은 현재 검찰의 수사단계인데 야당과 언론, 반정부단체의 대통령 하야요구가 헌법정신에 배치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나라 형편이 왜 이 지경까지 온 것인가.

박근혜 정부는 초기부터 인사정책에 실패했다. 친인척관리는 어느 정도 지켜졌으나 인사는 잡음이 잇따랐다. 국민들은 측근들만 감싸는 회전식 인사에 불만이 컸다. ‘이렇게도 사람이 없는 것인가?’ 대통령은 언론의 쓴소리를 외면하고 소통부재로 일관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지도자가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것은 ‘국민과 함께 마음을 같이 하는 위민(爲民)’이어야 한다. 세종의 인사테크닉을 배우고 반대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역대 제왕들의 흥망성쇠를 거울삼아야 역사에 빛나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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