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신라 백결은 가난한 음악가였다. 명절이 되어 떡방아 찧는 소리가 들리자 아내의 수심이 컸다. 가야금 앞에 앉은 백결은 떡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하여 아내의 상심을 어루만져 주었다. 누더기 옷을 입은 음악가를 선생이라고 호칭했으니 신라사회에서도 청렴은 귀감이 됐던 모양이다.
최영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부친의 유언을 실천했던 청렴한 무인이다. 무너지는 고려 사직을 지키려 했던 노장은 자신이 키운 후배 이성계에게 죽음을 당했다. 최영의 청렴한 정신과 기상만큼은 애석히 여긴 것인가. 이성계는 그가 죽은 지 4년 후 서둘러 복관시키고 시호까지 내린다.
‘청빈낙도’는 청백리들이 실천하고 싶은 명예로운 삶이었다. 세종 때 유관이나 선조 때 이원익 대감도 비만 오면 집이 새 우산을 받쳐야 했다. 유관은 아내에게 ‘우리는 우산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찌 할꼬’라고 말했다. 뇌물을 안 받고 녹봉으로만 살았으니 낡은 고가를 수리할 돈이 없었던 것이다.
서애 유성룡도 녹봉 외에는 뇌물을 받지 않아 항상 궁색하게 살았다고 한다. 서애가 모함으로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한강을 건널 배삯이 없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사람들이 엽전을 거둬 한강을 건너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청백리로 녹선 되기란 자격이 까다로웠다. 500년 역사 동안 약 210명밖에 안 되는 것을 보면 사대부들이 청빈낙도의 삶을 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너무 청백하여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었다. 중국 고사에는 지독한 청렴 관리들을 ‘혹리(酷吏)’라고 기록한다.
조우(趙禹)는 한 무제 때 ‘혹리’다. 그는 청렴하여 어사(御史)로 발탁됐으며 많은 율령을 제정했다. 관리가 범죄를 보고 묵살하면 똑같이 처벌하는 견지법(見知法)을 만들었다. 관리들은 이후로 잘못을 보면 서로 감시하고 고발했다. 한나라 사회는 각박해졌으며 결국 이 덫에 걸린 법률창안자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상앙(商鞅)의 악법’ 고사도 ‘좋은 법일지라도 백성들에게 가혹하면 그것이 독이 된다’는 것을 지칭한 말이다. 공손앙은 기원전 390년경의 인물로 혹리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나 엄격한 법집행이 백성들과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 결국 모함을 받아 사지가 찢겨 죽었다.
공의휴는 고대 중국의 청백리였지만 역시 혹리로 평가된다. 한 재상이 공의휴가 생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생선을 보냈지만 이를 돌려보냈다. ‘생선을 좋아하면서 왜 받지 않냐’고 측근이 묻자 공의휴의 대답은 이랬다.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는 것이다. 지금 내 녹봉으로도 생선 정도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런데 생선을 받기 시작하다가 파면되고 나면 내가 어떻게 생선을 먹을 수 있겠는가?”
이런 공의휴를 재상이 좋아할 리 없었다. 재상은 그가 너무 강직하여 조정에 필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여 기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영란법’이 시행되자 사회가 혼란의 와중에 빠졌다. 국민 여론도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면서 명암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피해가 예상되는 화훼, 축산농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도가 있다. 여기다 억대 보상금을 노리는 ‘란파라치’들이 등장, 사회를 감시와 불신의 늪에 빠지게 하고 있다. 란파라치를 가르치는 학원까지 생겨났다니 점입가경이다.
청렴 공직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김영란법이 혹 ‘혹리’의 부작용이나 ‘상앙의 악법’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일각에서는 공익을 위해 기부하는 일까지 권익위원회나 법률적 자문을 받는 사례가 생겼다. 아예 안 주고 안 받자는 풍조가 벌써부터 만연되어 인보상조의 기풍마저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직자들에 대한 청렴요구는 다를 게 없다. 공직사회가 부패하면 나라의 장래는 희망이 없다. 김영란법의 시행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공직사회가 스스로 금도를 지키는 것이 성공의 열쇠가 아닌가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