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성 전 명지전문대 겸임교수/법학박사
조지아주 현대차 배터리 공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근로자 300여명이 미국 당국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장면은 한국 사회에 깊은 충격을 던졌다. 부당한 과잉 체포 과정에서 벌어진 손과 발, 허리까지 묶여 끌려간 그 모습은 인간으로서 참기 힘든 굴욕과 모욕을 가져다줬다.
동맹국 국민이 동맹국 땅에서 그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민에게 아물기 힘든 상처로 남을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이민법 위반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민이 미국과의 관계를 다시 평가하게 만드는 계기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 국민은 반세기 가깝게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로 민족적 치욕과 고통, 수탈을 겪었다. 그러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미국은 우리에게 ‘해방국가’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미국이 일본을 패전시킴으로써 한국은 해방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그 환상을 깼다. 미국의 냉혹한 본질, 즉 돈과 자국의 이익을 우선한 태도가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으로 문제가 된 미국의 ‘비자 제도’는 그 역사적 뿌리부터 불평등과 차별로 얼룩져 있다. 그 사례로, 1939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 함부르크항을 떠난 900여명의 유대인 난민들에 대한 미국의 외면과 배척이 새삼 조명받고 있다. 그들은 미국 플로리다 해안을 밟지 못했다. 입국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자유의 나라”를 향해 뻗었던 그들의 손길은 냉혹하게 잘려 나갔다.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동안, 배 안에는 절망과 공포가 가득 찼다. 결국 유대인 난민들은 유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은 독일군의 군화 아래 짓밟힌 채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 조지아에서의 한국인 구금 사태는, 미국이 과거에 보여줬던 그 냉혹한 역사의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한·미 관계는 오랫동안 ‘철통같다’는 표현으로 설명돼 왔다. 그러나 이번 사건 이후, 국민 사이에서는 그 철통이 오히려 ‘쇠사슬’처럼 느껴진다는 말이 퍼지고 있다. 우리 국민이 수갑과 족쇄에 묶여 끌려간 현실이 동맹의 본질을 되묻게 하기 때문이다.
동맹이라면 최소한의 사전 교감과 협의가 있어야 했다. 미국은 “절대 깨지지 않는 동맹”이라 강조하지만, 한국민이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쇠사슬 구속”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제는 한·미 관계를 ‘쇠사슬 동맹’이라 부르고 있다. 앞으로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 그리고 양국 관계 전반에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으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에 있다.
이 사건이 던지는 교훈은 분명하다.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관용에 기대어서는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언제든 자국의 이익을 위해 또 다른 장벽을 세우고, 동맹국조차 예외 없이 배척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답은 아시아 자신에게 있다.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대륙이며, 이미 중국, 일본, 한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2025년 기준으로 미국의 GDP는 약 26조 달러이지만, 중국은 18조 달러, 일본은 4.5조 달러, 한국은 1.9조 달러에 이른다. 이 세 나라만 합쳐도 24조 달러로, 미국에 맞먹는 경제 규모다.
군사력에서도 중국은 200만명의 현역 병력과 2300억 달러의 국방비를 지출하며, 한국과 일본 역시 첨단 군사기술로 무장하고 있다.
진정한 아시아 공동체를 논할 때, 동남아시아를 빼놓을 수 없다. 인도네시아는 약 2억 8000만명의 인구와 1.5조 달러의 경제 규모로 이미 G20의 일원이다. 베트남은 제조업 중심의 급성장 국가로 500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력을 갖췄으며, “제2의 중국”으로 불린다.
필리핀은 1억명이 넘는 인구와 영어 기반의 노동력을 통해 글로벌 서비스 산업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역시 관광·자원·제조업을 기반으로 안정적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동남아 5개국의 GDP를 합치면 약 6조 달러에 이른다. 동북아시아 3국과 더하면, 아시아는 이미 미국을 넘어서는 거대한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분열이다. 역사적 갈등과 영토 문제, 민족주의적 경쟁심이 아시아의 단합을 가로막고 있다. 미국은 이 틈을 이용해 갈등을 유발하거나 조정하며 자국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분열된 아시아는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국의 이기적이며 편협한 자국 중심의 국가 운영 방식에서 벗어나려면, 아시아 스스로 힘을 합쳐야 한다. 아시아가 결속해 거대한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를 만든다면, 미국의 일방적 정책에도 당당히 대응할 수 있다.
동아시아가 중심이 돼, 인도를 포함한 더 넓은 경제·군사 연대를 구축한다면, 미국의 부당하며 폭력적인 압박에도 실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창출할 수도 있다. 이는 단순한 경제공동체를 넘어, 약소국이 희생당하지 않고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번 조지아 사태는 뼈아픈 상처이지만, 동시에 기회일 수 있다. 미국의 민낯을 확인한 지금, 한국과 아시아는 선택을 해야 한다.
언제까지 쇠사슬 같은 동맹에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만들 것인가. 분열된 아시아는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지역공동체로 결속된 아시아는 그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