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시사평론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의 전승기념일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일본 히로히토 천황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을 기념하는 나라는 영국이다. 우리나라의 광복절이 그것이다. 미국은 도쿄만 요코하마에 정박 중이던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가 맥아더 장군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이 전승절이다. 유럽은 대체로 히틀러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5월 8일을 전승절로 기념하고 있다. 러시아는 시차를 반영해 5월 9일이다. 당시 국공합작으로 일본에 승리한 중국과 대만은 9월 3일이다. 일본으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은 날은 9월 2일이지만 이를 접수한 9월 3일을 기념일로 하고 있다. 지난 2015년 9월 3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해 중국 톈안먼 망루에 올라 열병식을 지켜봤던 바로 그 기념일이다.
3일 열릴 중국의 전승절 80주년 행사는 좀 더 특별할 것 같다. 중국은 사상 최대 규모의 기념식과 군사 퍼레이드를 통해 막강한 군사력과 함께 미국에 맞서는 다수의 우호 세력을 과시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행사에는 톈안먼 망루에 시진핑 주석과 함께 양옆으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나란히 서게 된다. 지난 5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 시 주석이 참석했으므로 이번 푸틴 대통령의 참석은 그 답방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그것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평화협상 중재가 사실상 실패로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서 푸틴 대통령의 참석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여기에 김 위원장까지 참석하면서 상황은 더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번 행사에는 북한과 러시아 외에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서 26명의 정상급 인사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반미’ 성향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적잖은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번 중국의 전승절 80주년 행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김 위원장 참석이 갖는 의미가 각별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한미 정상회담을 전후로 경주 APEC에 김 위원장을 초청하는 문제가 제기되자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헛된 망상’이라고 일축했다. 트럼프 대통령까지 직접 김 위원장과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북한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중국 전승절 80주년 행사에는 참석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과 미국이 내민 손은 단박에 거절하면서도 시 주석의 손은 잡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김 위원장의 이번 베이징 방문은 무려 6년여 만이다. 그동안 북중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분석이 많았지만 이를 일축하듯이 직접 톈안먼 망루에 오르는 선택을 한 것이다. 게다가 김 위원장이 다자외교 무대에 참석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쩌면 북한·중국·러시아 3국 정상회담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물론 아시아 각국 정상을 비롯해 아프리카 등의 정상들과 만나는 양자회동도 있을 것이다.
북한은 이미 ‘핵보유국’으로서의 위상을 대내외에 밝힌 상태다. 그렇다면 북중러 3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서는 것만으로도 그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혹여 3개국 정상회담이라도 열리면 그 내용에 더 큰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북한은 이미 러시아와 ‘군사동맹’을 맺은 상태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시아 국가들을 비롯해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도 김 위원장과의 만남에 적잖은 공을 들일 것이다. 첫 다자외교 무대에 나서는 김 위원장의 무게감이 생각보다 크다는 뜻이다. 김 위원장도 이번 다자외교 무대를 통해 핵보유국으로서의 입지를 보다 견고하게 다지려 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던지는 메시지로서도 매우 강력한 의미가 내포돼 있다는 뜻이다.
김 위원장의 이번 중국 전승절 80주년 행사 참석은 한마디로 북러 군사동맹에 대한 재확인, 이로 인한 중국과의 갈등 해소와 관계 정상화 그리고 핵보유국으로서 다자외교 무대 데뷔라는 굵직한 실리를 챙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김 위원장과 올해 안으로 만나고 싶다던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서는 북미 정상회담이 다시 성사될 경우, 그 전제 조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톈안먼 망루에서의 모습은 강력해 보인다. ‘핵보유국’들의 대열에 공식적으로 동참했다는 대외적 상징으로 내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전승절 80주년 행사에 우리는 우원식 국회의장이 참석할 예정이다. 정상급은 아니지만 이재명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울뿐더러 대한민국 의회의 수장이라는 점에서도 무게감이 가볍지는 않다. 그 연장에서 김 위원장과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경주 APEC에 김 위원장을 공식 초청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이 대통령의 친서라도 갖고 가면 더 좋다. 지난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이 언급한 ‘피스메이커’와 ‘페이스메이커’는 이럴 때 작동돼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 휴전선이 한미일과 북중러의 동아시아 신냉전 구도를 고착되게 해서는 안 된다. 한반도 평화는 한미일 관계만으로는 풀 수 없다. 이번 중국의 전승절 80주년 행사를 보면서 우리 외교가 좀 더 멀리, 좀 더 높이 볼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의 편향된 인식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100여년 전의 아픈 교훈을 곱씹어 봤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