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시사평론가

대통령의 메시지는 엄중하다. 말 한마디, 단어 하나도 허투루 내놓지 않는다. 더욱이 ‘광복절 경축사’처럼 국내외 관심이 집중되는 국경일 메시지는 의미가 더 크다. 이런 점에서 지난 15일 이재명 대통령의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사는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갓 출범한 새 정부의 대외정책이, 그것도 광복 80주년을 맞아 국내외에 발표되는 뜻깊은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광복의 역사적 의미를 거듭 강조했다.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불사른 수많은 선열의 희생과 헌신으로 일궈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9.19 군사합의’를 선제적으로 복원해 나가겠다고 했다. 노무현·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이어가겠다는 뜻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올해가 ‘한일수교 60주년’이 된다면서 국익중심의 실용외교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본도 과거의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한일 간의 신뢰가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의 대외정책 메시지는 기대만큼의 화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당장 북한의 반응은 냉랭하다 못해 관심조차 없다는 태도이다. 우리 정부가 북한의 대남 확성기 철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자,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 14일 “확성기를 철거한 적이 없고 철거할 의향도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정부가 확성기를 철거하든, 방송을 중단하든, 훈련을 연기하든 축소하든 개의치 않으며 관심도 없다고 했다. 이튿날의 이 대통령 광복절 경축사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5일 이시바 총리는 ‘패전 80년’을 맞아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했다.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첫 광복절 경축사, 한일수교 60주년 따위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전의 아베 정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심지어 차기 총리로 거론되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직접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참배까지 했다. 

광복 80주년, 각오와 다짐은 더 당차게 새기되 착각과 오판은 금물이며 자멸의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우리 독립투쟁사에 대한 자긍심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독립투쟁의 역사를 부정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하는 행위는 이제 더 이상 용납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자행된 독립투쟁사에 대한 농락과 폄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모욕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광복 80주년이라며 대대적인 경축 행사도 가져보지만 독립투쟁사는 여전히 반쪽에 불과하다. 독립투쟁의 현장은 가는 곳마다 방초만 무성한 채 눈물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당시의 영웅들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짓밟혀 존재감마저 위태롭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내뱉는 냉전 극우세력들의 억지와 궤변은 이제 소음을 넘어 ‘위협’으로 들린다. 그들 극우는 극히 일부가 아니다. 많아도 너무 많다.

천안의 독립기념관에서도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대한민국 독립투쟁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상징적인 곳이다. 그러나 이날 김형석 관장의 기념사는 다시 한번 우리 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이날 김 관장은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함으로써 얻은 ‘선물’이라고 말했다. 역사인식에 대한 저열한 수준은 논외라 하더라도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날에, 그것도 독립기념관에서 그리고 그곳의 관장이라는 사람이 내놓은 발언이라곤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독립투쟁사에 대한 무지와 왜곡이 아니라 ‘모욕’에 가깝다. 독립을 위해,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열의 피눈물을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결코 할 수 없는 발언이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 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만주 벌판만 가봐도 ‘찢기는 가슴’의 통증이 얼마나 아픈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도 ‘선물’이라니. 어찌 이런 인물이 독립기념관장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한두명이 아니다. 많아도 너무 많다.

광복 80주년은 분명 경축할 일이다. 특히 지난 80년 동안 우리가 일궈낸 정치, 경제적 성과는 참으로 눈부시다. 그리고 오늘 역사적 번영기를 맞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성취의 이면에는 잔뿌리까지 끊어내야 할 ‘독초’들이 득시글하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설마 하다가는 그 독초들이 국토를 유린하고 민초들을 덮칠 것이다. 막연한 우려나 노파심의 발로가 아니다. 먼 미래 얘기도 아니다. 벌써부터 우리 주변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일부는 이미 권력이 됐다. 윤석열 정권은 어쩌다가 탄생한 ‘괴물’이 아니다. 김형석 관장도 어쩌다가 자리를 차지한 ‘기인’이 아니다. 그들의 뿌리는 깊고도 촘촘하다. 광복 80년, 그 새 그렇게 깊고도 넓게 커 버렸다.

이번 광복 80주년은 무엇보다 헌정질서 정상화와 함께 국민주권의 원칙을 재확인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광복절 노래’ 한 소절마다 그토록 마음을 울렸던 때가 또 있었던가 싶다. 그러나 나라 안팎으로 엄청난 도전이 삼각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이 대통령이 이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이다.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따라잡지 못하고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치이다가 마침내 국권을 빼앗겼던 120년 전 을사년의 과오를 다시는 되풀이할 수 없습니다. 2025년 을사년은 그때와 달라야 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중 한 대목이다. 올 을사년은 정말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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