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인터뷰도 감상하시죠.
●순한 모습의 8각 구도 ‘달항아리’
●“염치없는 시대에 필요한 조형”
●‘한국 미술’과 ‘도자’를 향한 열정
●20년 후 결실 ‘도자전집’ 발행까지
●수중 유물 발굴부터 박물관 운동
●유엔 NGO 통해 해외 학생 유치
[천지일보=이지예 기자] “옛날에 노자 사상에 염치가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어요. 지금 염치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잖아. 그래서 달항아리가 더 부각되고 있는 것 같아요.”
‘달항아리’ 작가로 알려진 석경고미술연구소 황규완 소장의 설명에 따르면, 달항아리가 요즘 사람들의 ‘염치’를 소환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애초에 무언가를 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교화시키는데 뜻이 있는 이 도자기에 그는 특별히 애정을 쏟아왔다. 달항아리는 생긴 모습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순하고 편안해지게 만들어 준다는데, 그런 항아리를 오랜 시간 바라보았기 때문일까. 황 소장의 모습은 어쩐지 달항아리와 많이 닮아있다.
◆달항아리와의 인연
황 소장은 도예나 그림 즉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관광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관광의 원천인 한국고미술에 흠뻑 빠져 한평생 미(美)를 추구하며 살았다. 특히 한국 도자에 빠져든 그는 수중 잠수 실력을 발휘해 국내외에서 해저유물 발굴가로도 명성을 쌓았다. 지상파 방송에서 해저유물 발굴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발굴 작업을 끝내고 바다 위로 올라오려면 혹독한 감압의 시간, 빛과 소리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바닷속에서 8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죽지 않으려면 아주 천천히 올라와야 해요. 제가 그때 바닷속에서 많은 생각을 해서인지 수련을 많이 한 도인을 만나도 대화가 잘 된답니다.”
그러던 중 그는 많은 도자 중에서도 달항아리를 주목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다해 달항아리를 연구했다. 직접 굽고 화폭에 그렸고, 나아가 달항아리 춤까지 만들어 해외에서 공연도 진행했다.
달항아리는 2005년 고궁박물관 개관 특별 전시에서 본격적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됐다. 금세 인기가 높아져 너도나도 달항아리를 만들었지만, 둥글고 크면 달항아리라는 인식이 다였다. 달항아리를 제대로 알려주고자, 그는 원조 격인 18세기 금사리 가마에서 제작한 달항아리를 재현시키기 위해 직접 만들고 그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교화를 위한 도자 ‘달항아리’
달항아리는 이제 유명해졌다. 그럼에도 달항아리를 바르게 전하는 전문 학자가 없고 그 용도를 알지 못하고 달항아리를 감상한다는 사실을 아쉬워했다.
그는 “바르게 살라는 가르침을 담아 탄생한 도자기인데 이 시대에 아주 필요한 조형”이라고 달항아리를 소개했다. 감상용 기물인 달항아리는 알고 보면 ‘팔각’ 형태를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둥글어 보이지만 두 덩어리가 불 속에서 구워지면서 팔괘를 뜻하는 비정형성 8각 구도를 형성한다. 이는 조선 사회가 지향한 핵심 이념인 ‘효제충신(孝悌忠信)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8가지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 어느 대학자가 솜씨 좋은 물레를 돌리는 대장과 합작해 만들었는지 몰라도, 달항아리처럼 교화를 위해 탄생한 항아리는 세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어요. ”
18세기에 만들어진 조선 달항아리는 전 세계에 있는 것을 다 합쳐도 30여 점에 불과하다. 해외 유명 박물관들이 달항아리 한 점쯤은 소장해야 한다는 염원이 있을 만큼 세계 도자 미술품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다.

◆‘도자전집’ 제작을 위한 20여 년의 도전
황 소장의 도자를 향한 열정과 부지런함은 끝이 없었다. 해외 생활을 마치고 2000년 초에 한국에 들어와서 ‘도자전집’을 만드는 모험을 시작했다. 그는 ‘도자 왕국’인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도자기 전집이 하나 없다는 데 안타까움이 들었다. 역시나 과정은 험난했다. 정부에서는 예산을 핑계 대며 거절했고, 출판사도 ‘몇 권이나 팔리겠습니까’라고 되물으며 거절했다. 교수들이나 도자 학자들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황 소장은 이들을 설득할 자료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 직접 4년여 시간에 걸쳐 4천여 점으로 구성된 초안을 정리했다. 고생 끝에 32권의 책을 완성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도 더 이상의 여력이 없어 덮어 놓았다.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정치권에 있는 지인이 황 소장의 집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꽂혀있는 32권의 책을 보게 됐다. 일은 되는 시기와 때가 있는 법이었나보다. ‘도자전집’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황 소장의 얘기를 그날은 묵묵히 듣고만 돌아갔다고 한다. 한 보름쯤 지나 연락이 왔다. 경기 이천시 쪽으로 연결이 됐고, 설득 끝에 ‘도자전집’에 예산이 편성됐다. 이후 한국도자전집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일에 사명감을 가졌다고 강조했다.
“제 개인의 이득이 중요하지 않았어요. 한국 도자 산업이 육성되고 고려청자다 백자다 큰소리는 치면서, 실제 외국인에게 소개할 책 한 권이 없으면 얼마나 부끄럽나요. 20여년 이상 걸려 성취를 한 거죠”

◆미술을 바르게 전달하는 ‘전달자’의 삶
“우리는 순한 민족이잖아요. 한국 미술도 순하기 때문에 세계가 열광한다고 봐요. 아쉽게도 정작 한국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아름다운 걸 돌보고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평생 한국 미술을 연구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그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력이 있다. 인사동 일부 상점에서 어르신들만 취급했던 미술 골동품을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고 싶어 백화점 전시장 판매를 최초로 시도했다. 한 번 전시하면 400점 이상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이는 일반인들에게 골동품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기회가 됐다.
그는 이어 박물관 운동을 시작했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수집품들도 모이면 큰 전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민중박물관협회를 개소했고, 50여 년이 지나 한국박물관협회로 성장했다. 당시 천 개 박물관 세우기 운동을 시작했는데 현재 900여 소가 넘는 박물관을 세우는 결과를 이뤘다.
이제 80이 넘는 나이가 되어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도 잠시, 그에게 새로운 ‘전달자’의 역할이 생겼다. 세종학당재단이 개설한 세종학당 150여 군데가 동양권에 있는데, 한국어 실력을 갖추면 이곳을 통해 한국으로 유학을 올 수 있다. 마침 그가 유엔 NGO 그룹에 소속과 자격이 있어 이곳 산하로 연계해 확대 추진하도록 했다. 특히 그는 예술 분야에서 해외 학생들을 이끌고자 한다. 학생 수가 많이 모자란 국내 학교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번에도 그의 아이디어와 추진력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가 이토록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한국 미술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과 나눔에 대한 의지였다.
“미술을 깊이 사랑하고 그 마음을 나누고자 했습니다. 앞으로도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욕심 없이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욕심 안 내면 병도 없을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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