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총, 3.1절 106주년 기념예배서
임희국 교수 “3.1운동, 개신교 주도”
개신교 기여 크나, 주도체는 천도교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는 지난 1일 ’3.1절 제106주년 기념예배‘에서 ‘3.1운동과 기독교의 역할’을 주제로 학술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 장로교신학대학교 역사신학 임희국 전 교수는 “3.1운동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요, 성경적 정의 개념의 실천이며 성경적 민족주의의 발현이었다”며 “3.1운동은 개신교가 주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처럼 3.1운동은 개신교가 주도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당시 역사적 사실을 다룬 여러 자료를 통해 이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3.1운동을 개신교가 주도했다는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맞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왜곡된 해석이 될 수 있다.
3.1운동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천도교와 불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계가 협력해 추진한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식 역사 자료와 연구 논문에서는 3.1운동의 주도 세력을 천도교로 서술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역사 자료 사이트 ‘우리역사넷’은 “3.1독립운동에서 천도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한 연구 논문에서도 “3.1운동은 민족대표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추진됐으며 그중 천도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우라역사넷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 선생을 중심으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 지도자들이 3.1운동의 실행 계획을 수립했으며, 최린의 주도로 개신교와 불교 등 종교 조직 간 연합이 이뤄졌다”고 밝히고 있다.
◆천도교와 개신교의 역할
천도교 지도부(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가 독립운동을 본격 논의하기 시작한 건 1918년 1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된 후부터다.
처음에는 ‘자치운동’을 추진하려 했으나, 1919년 1월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아 이를 독립운동으로 전환했다.
3.1운동이 실행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천도교는 초기 기획부터 실행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운동 세가지 원칙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세운 천도교 지도자들은 초기 대한제국 고위 관료 출신 명망 있는 인사들을 포섭하려 했으나 거절당한 후, 개신교와의 연합을 추진했다.
당시 개신교 내에서도 독립운동이 논의되던 중 기독교계에서 신망이 높던 오산학교 교장 이승훈이 대표로 교섭을 맡았다. 처음에는 교리 문제로 이견이 있었으나 결국 조선의 독립이라는 대의 앞에서 합의를 이뤘다。
이후 개신교 감리교 지도자들이 참여를 결정했고 2월 24일 천도교와 개신교의 연합이 공식적으로 이뤄졌다. 이후 불교계까지 동참하면서 3교 연합이 성립됐다.
2월 25일, 독립선언서 서명자(민족대표 33인) 심사와 함께 선언서 발표 장소를 서울 탑골공원으로 정하는 등 실행 계획이 확정됐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당초 예정됐던 탑골공원이 아닌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과 시민들은 독립만세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민족대표 33인은 개신교가 가장 많은 16인(장로교 7, 감리교 9), 천도교 15인, 불교 2인(백용성, 한용운) 등으로 구성돼 있다.
평양, 정주, 서울 등 기독 학교들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쓰였고 개신교 신도와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개신교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평등과 자유 사상도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3.1운동은 특정 종교가 주도한 운동이 아니라, 종교, 민족 전체가 함께한 독립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천도교가 독립운동의 초기 계획과 조직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개신교와 불교 역시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3.1운동을 둘러싼 ‘교파 중심주의’ 논란
천도교, 개신교, 불교가 연대해 3.1운동이라는 거대한 독립운동을 폭발시켰지만, 그 이면에서는 교파 간 업적을 내세우려는 움직임에 대한 지적이 나온다.
일부 종교 단체가 자신들의 공헌을 강조하며 3.1운동의 의미를 특정 교파 중심적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3.1운동을 다룬 대부분의 책에서 민족대표를 배출한 숫자에 따라 개신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 순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천도교계에서 출간된 자료에서는 천도교 15인, 감리교 9인, 장로교 7인, 불교 2인 순으로 서술하며, 개신교를 두 개 교파로 분리해 천도교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기술된다.
개신교 계통의 자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대다수 개신교 통사에서는 개신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으로 서술하며, 감리교와 장로교를 분리할 경우에도 장로교 7인, 감리교 9인 순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감리교 측에서는 ‘장로교보다 감리교의 기여가 컸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3.1운동 당시 피검된 개신교인의 비율을 제시하기도 한다.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회 상임대표를 맡기도 한 천도교 박남수 전 교령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개신교는 그때부터 분파적인 작동을 많이 한 종단”이라며 “장로교는 장로교대로, 감리교는 감리교대로 대표로 참여하려 했고, 이로 인해 양측이 통합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교파 중심주의적 해석은 3.1운동의 연대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도 나온다. 박 전 교령은 “독립선언서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를 향해 있다”며 “우리만의 평화가 아니라 아시아와 전 인류의 평화가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