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그대는 3월 2일 이화학당 기숙사에 갔었는가?’
‘그렇다’
‘몇 사람이 모였는가?’
‘박인덕, 황애시덕, 김마리아, 김하느론, 신체르뇨 등 도합 11명이었다’
‘그대는 총독 정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치에 대해서는 모른다’

1919년 3월 18일. 경성지방법원 감사국에서 진행된 조선총독부 검사의 신문에 나혜석은 거침없는 분명한 어조로 답했다. 3월 2일, 나혜석은 이들과 여학생 3.1운동의 참여를 의논 했고, 4일에는 개성과 평양 등지에서 자금모금활동과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했다. 일본 식민 현실을 절감했지만, 만세운동의 절실함을 가슴으로 느꼈던 이들이다. 그리고 3월 5일 아침, 나혜석은 이화학당 학생들과 함께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치고 있는 거리인파에 몸을 실었다.

‘대한독립만세!’ 그 시대에 이 여섯 글자는 단순한 문구가 아니었다. 모든 시대의 경계를 허물고 경계의 틀을 넘어서는 위력을 가진 단어였다. 그리고 그 글자의 뜻을 담은 태극기를 가슴에 품었던 우리 민족은 자유를 염원하며 만세를 합창했다.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전 민족적 저항운동으로 일어섰다. 당시 일본 경찰도 만세운동의 확산규모와 그 여파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국적으로 3.1 만세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연령·지역·성별의 경계는 허물어진 지 이미 오래전이었다. 그 시기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나혜석은 3월 8일 이화학당의 식당에서 체포된 뒤 옥고를 치르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5개월 뒤 면소되어 풀려난다.

나혜석에 대하여 많은 이들은 예술가적 면모를 지닌 인물로 주목하고 있다. 문화가 민족정신을 대변하듯이 나혜석의 예술성에는 그녀의 사상이 담겨 있다.

나혜석(1896~1948년)은 경기도 수원에서 나기정(羅基貞)과 최시의(崔是議)의 5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은 구한말 사범관, 시흥군수를 지냈지만 자녀들은 모두 일본에 유학시킬 정도로 개화된 관료였다.

신문물과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보낸 유학이었지만, 일제강점의 현실은 이들을 민족의 현실을 인지하는 젊은이의 대열에 서게 했다. 일본유학과정에서 나혜석은 둘째 오빠 경석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운동과 한국 민족운동의 본원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

▲ 나혜석 (사진제공: 심옥주 소장)
일본에서 도쿄사립 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하여 미술 활동도 했지만, 이에 머물지 않았던 나혜석은 시대의 틀을 혁파하는 시, 소설, 수필, 미술에세이, 여성비평, 페미니스트 산문 등을 게재하면서 여성해방운동가의 대열에 선다.

또한 그녀는 69편의 저작과 캔버스의 유채작품을 통해서 신여성의 모델로 주목받았다. 그런 그녀의 작품 속에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의 메시지와 시대변혁을 추구하는 혁신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조선의 여성, 외교관의 부인, 문학가, 미술가, 여성해방운동가, 독립운동가 등이 나혜석을 수식하고 있다.

그중에서 필자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편협한 시대 환경의 틀을 넘고 싶었던 신여성의 몸부림과 그 속에서 조국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진정으로 염원했던 한국여성의 면모를 생각한다. 그리고 예술가 나혜석에게서 침잠되어 있던 여성독립운동가적 면모를 조심스럽게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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