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늦깎이로 출발해 대기만성의 위업을 달성한 역사상 인물은 수없이 많다. 고구려의 온달 장군, 조선의 성웅 이순신, 화가 고흐와 고갱,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
늦깎이라고 하면 우선 작가 박완서 씨부터 떠오른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다 마흔이 되던 해에 등단한 후 만 여든을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우리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빼어난 활약을 보인 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와 브라질월드컵 참패로 침체된 분위기에서 국가대표 코치로 발탁돼 한국 축구대표팀에 밝은 미래를 열어주고 있는 신태용 코치는 오랜 ‘비주류’ 역정을 보낸 이다. 선수 때나 감독 시절 그는 프로축구 최고의 ‘별’이었다. 그러나 월드컵에는 단 한 번도 출전하지 못했다.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스타 출신이 아니라는 편견과 인맥 축구의 한계에 떼밀린 B급 축구 인생이었다. ‘비주류’의 설움을 딛고 뒤늦게 꽃을 피우고 있다. 최근 A매치 2연전에서 대표팀을 이끈 그는 돋보이는 전술과 지혜로운 선수 운용으로 경기를 성공적으로 치러내 한국 축구에 새 희망을 쏘았다. 프로야구 롯데의 정훈(27) 선수도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많은 길을 돌고 돌다 이제야 성공 신화를 쓰고 있는 케이스. 2006년 프로야구 현대 신고선수로 출발했으나 방출되고 말았다.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친 뒤 경남 창원의 모교인 양덕초등학교에서 꿈나무들을 가르치다 도저히 꿈을 포기할 수 없다며 야구 배트를 다시 잡았다. 군복무 시절 그가 얼마나 손에 글러브를 끼고 싶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야구에 대한 열정 하나로 도전에 도전을 거듭한 끝에 그는 지난해부터 롯데의 주전 2루수로 맹활약하고 있다.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관전자로서는 이들의 반란을 바라보는 일이 흐뭇하고 즐겁기만 하다.
어느 프로 바둑기사가 아침산책길에 혼자 커피 전문점에 앉아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후배 바둑기사를 만났다. 그 젊은 기사는 다음날 아침에도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책읽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처음엔 바둑책을 보고 있는 것이려니 했다. 바둑기사로 성공하려면 바둑에 미쳐야 하니까. 학문은 물론, 스포츠나 예술로 성공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러하듯 다른 잡념이 없어야 하니까. 그래야만 한다고 여겨왔다. 조치훈이 “목숨을 걸고 둔다”고 했을 정도로. 그러나 그 후배는 바둑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가 몰두해 읽고 있는 책은 전혀 뜻밖에도 인문학 서적이었다. “그런 책도 바둑에 도움이 되느냐”는 물음에 후배 바둑 기사는 살짝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거침없이 대답했다.
“바둑을 잘 두고 싶어 인문학 고전을 읽고 있습니다.”
91년생인 박창명 초단.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이지만 또래들에 비해 프로기사로서 출발이 늦었다. 입단대회에서 계속 떨어지자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걸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재도전한 끝에 올해 비로소 바늘구멍처럼 좁은 등용문을 통과했다. 지난 2월 입단테스트를 통과하자 박 군의 아버지는 “프로기사 되기가 너무 어려워 우리 아들은 안 되겠구나 했는데 결국 해냈다”며 감격해했다. 박 초단은 비교적 유순한 스타일이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바둑으로 반상을 주도한다. 정석만을 고집하는 천편일률적인 바둑을 두지 않는다는 얘기다. ‘으악’ 하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새로운 한 수를 들고 나와 엄청난 강자를 누르고 있다. 입단 5개월째 새내기 박창명이 꺾은 상대는 조한승 9단, 원성진 9단, 중국의 커제 4단 등 기라성 같은 고수들. 특히 중국리그에서 12연승을 질주하며 중국의 실질적인 최강자로 등극한 커제는 무명의 박창명에게 패하고 중국에 돌아가 대국을 복기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17일 열리는 한국물가정보배 준결승에서 김승재 6단과 맞붙는 박창명의 돌풍이 주목된다.
반면, 두 살 아래로 한국 바둑계 랭킹 1위로 군림하고 있는 박정환 9단 같은 경우는 자나깨나 바둑만 생각하는 기사로 유명하다. 식사할 때도, 비행기나 차량으로 이동 중에도 바둑공부에만 전념하는 공부벌레다. 그렇게 해야 성공한다. 문제는 창의력이다. 인문학과 과학의 결합을 중시한 스티브 잡스의 예를 보더라도 인간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소양과 첨단 기술의 창의적인 융합은 소중하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 책을 읽으면 바둑에 대한 안목이 넓어진다’고 말하는 젊은이 박창명의 발언은 도발적이면서도 신선하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플라톤이 지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비단 어려운 철학책·역사책뿐만 아니라 ‘손자병법’ 같은 책도 읽는다. 무슨 내용이 도움 되는 걸까, 인간 군상들의 심리를 꿰뚫는 글들이라 그럴까 궁금하다. 필자의 젊은 시절에도 바둑계에 무서운 초단들이 있었다. 당시 강훈 초단, 서능욱 초단, 양건 초단 등 신예들의 멋진 활약상을 박창명이 추억처럼 떠오르게 한다. ‘박창명 발(發)’ 태풍을 지켜보면서 불굴의 투지와 상상력으로 아름다운 새 역사를 쓰는 ‘제2, 제3의 박창명’이 각 분야에서 계속 배출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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