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이 지나갔다. 왠지 이 5월이 가기 전에 스승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싶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도 스승에 대한 의미를 가슴깊이 곱씹어 보게 하는 일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과연 스승의 정의가 뭘까부터 시작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 스승의 날에 정작 스승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스승의 은혜를 되새기기 위해 제정된 스승의 날,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의 마음은 어버이시다그래서 스승은 곧 어버이다.

515일이 스승의 날로 제정된 것은 민족의 스승이신 세종대왕의 탄신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승이란 단어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보면, 불교에서 의 호칭을 스승이라 부르는 데서 비롯됐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5세기 문헌 월인석보와 최세진의 훈몽자회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출가 수행자를 스님이라 기록했다. 옛날에는 중의 높임말로 사승(師僧)’ 또는 ()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또 사()의 중국식 발음이 란 점에서 사승이 스승의 어원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이 사승이 변해 스승이 되었고, 사님이 스님이 된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스승은 중을 높여 부르는 사승에서 온 말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오늘의 교육을 말하면서 선생은 있지만 스승은 없다고 말하곤 한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차원을 넘어서 삶과 생명의 지혜까지도 가르치는 진정한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일 게다. 옛 말에도 백면서생(白面書生)’이란 말이 있다. 글만 읽는다 해서 선생이 될 수 없음을 꼬집는 말이다. 인도에서는 스승을 구루(Guru)’, 제자를 시크(Sikh)’라 하며, 비록 아들이라도 구루가 되면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제자로서의 존경을 표시한다. 이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이며, 스승의 본질적 개념은 나이와 직책과 어떠한 관계에 있음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스승은 단지 기술 전수자나 지식을 가르쳐 주는 선생의 개념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는 그런 일반적 가치를 넘어선 생명과 지혜를 나누는 존재로서의 높은 차원의 의미를 두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런 의미로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제자들의 안위를 돌보다 자신의 목숨을 버린 단원고등학교 12명의 선생님들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교육의 본이 됨으로써, 선생님의 위치를 넘어 마침내 스승이 되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제 우리는 일반적 스승의 개념을 뛰어 넘어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라는 가사 말처럼, 하늘의 뜻과 하늘의 이치를 가르쳐 줄 이 시대의 참된 스승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참된 스승의 정의는 뭘까. 그 답은 바로 종교(宗敎)라는 단어의 뜻 속에 감춰져 있었다. , 하늘의 것을 보고, 그 본 것을 가르치는 학문이 신의 가르침이요 종교다. 나아가 이러한 종교를 가르치는 자 즉, 하늘의 것을 보고들은 자가 바로 이 시대의 참된 스승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그토록 인생과 인류를 사랑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과 정신으로 오신 예수, 그는 생명 대신 사망의 권세아래 놓인 인류를 회복하기 위해 일하시는 아버지요 하나님의 그 고귀한 섭리를 깨달았기에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가장 잔혹한 형벌인 십자가 형벌에 맡길 수 있었다. 그 고귀한 희생의 피로 인류는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됐으니, 육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과 육을 살리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분신으로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자요 참 스승이다. 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고 했다. 당시도 많은 사람이 하늘의 것을 가르친다고 했으니 스승은 많았다. 하지만 예수와 한 몸을 이루어 예수의 생명을 소유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디모데와 디도를 향해서도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할 수 있었으니 생명을 주는 진정한 스승이요 어버이였다. 5백여 년 전 조선 명종 때, 유학자요 천문지리학자요 예언가인 격암 남사고 선생은 말세가 올 것을 예고하면서, “말세골염 유불선 무도문장 무용야라 했다. 이는 유불선 모든 종교가 구태의연해지고 자기 종교에만 골몰하며, 가르치는 선생은 많아도 참 도()’가 없으니 아무 소용 없는 종교가 되고 말 것임을 예언해 놓았으니, 그러한 종교현실이 오면 그 때가 바로 말세임도 깨닫게 한 것이다. 과연 그러한 것은 오늘날 일만 스승이 있어도 우리에게 생명의 지혜를 깨닫게 할 스승은 없다. 이러한 때, 2천 년 전 예수님으로부터 열린 구원의 길이 마무리되고 결실되고 완성되기 위해선 예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스승이 예비돼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신의 가르침 속에 감춰져 있는 생명과 지혜의 교훈을 들려줄 이 시대의 스승이요 참 목자를 찾아 그 가르침을 받아야 함이 스승의 날 우리가 깨달아야 할 덕목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