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당의 멸망을 촉진한 민란을 일으켰던 황소(黃巢)는 지금의 산동성 하택현(荷澤縣) 출신이다. 이 사건은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토황소격문’이라는 유명한 글을 남겨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황소의 조상은 소금장사로 거부가 되었다. 이름은 우직한 황소가 연상되지만 원래 학문을 좋아했던 사람이다. 황소는 수차례 과거에서 낙방하자 무예를 익혀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주었다. 수많은 도망자들이 찾아오자 황소는 호협으로 명성을 얻었다. 성년이 되자 가업을 이어받아 사염판매업에 종사했다. 백성들의 생활필수품이었던 소금은 높은 가격으로 팔렸다. 조정은 거액의 염리를 얻기 위해 사염업을 금지했다. 막대한 이윤을 둘러싸고 관과 민이 격렬한 다툼을 펼쳤다. 조정과 맞서 사염업으로 이익을 챙기려면 단단한 조직은 물론 상당한 계략과 용력을 갖추어야 했다. 사염판매조직은 날로 성장했다. 황소는 조정의 가혹한 조치에 대항하는 기의가 발생하자 최고지도자로 성장했다.

황하유역이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조정의 수탈은 강남지역에 집중되었다. 관의 핍박이 심해지자 백성들의 반발도 점차 높아졌다. 강소, 절강, 안휘성 등지에서 잇달아 민란이 발생했다. 천하의 백성들은 구걸을 하거나 산택으로 도망쳐 도둑이 되었다. 부부가 살 길을 찾아 헤어지고 부지지간이라고 구해주지 못할 지경이었다. 당조정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비를 긁어모으려고 더욱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관동의 백성들은 이러한 당왕조의 통치에 반대하는 대규모의 민란을 일으켰다. 실의에 빠진 사대부나 황소와 같은 호협이 민란에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반란조직으로 발전했다. 875년, 왕선지(王仙芝)가 지금의 하남성 장원(長垣)에서 기의하자 황소도 재빨리 동참했다. 왕선지는 조정에서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고 상벌을 불평등하게 적용한다고 성토했다. 순식간에 수만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들이 산동성 일대를 뒤흔들자 하남성에서도 민란이 발생했다. 민란은 관동지역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황소와 왕선지가 중원을 전전하며 500여 곳을 점령했지만, 당조정은 제대로 대책을 수립하지 못했다. 왕선지가 피살된 후 황소는 잔여부대를 이끌고 양광(兩廣)과 복건을 점령하여 당조정의 경제적 명맥을 장악했다. 879년 10월, 황소는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북벌을 개시하여 당왕조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황소의 선봉부대가 장안으로 진입하자, 당의 금오(金吾)대장군 장직방(張直方)은 문무백관과 함께 패상에서 황소를 영접했다. 희종은 성도(成都)로 도망쳤다. 백성들의 박수를 받으며 장안에 입성한 황소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당왕조의 종실, 귀족, 부호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백성들에게 분배했다.

12월 23일, 황제로 즉위한 황소는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으로 정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란이 왕조를 세운 후부터 내리막길로 접어든 것처럼 황소도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882년 정월, 당조정은 조정을 재편하고 장안을 압박했다. 장안은 북쪽을 제외한 나머지 3방향에서 포위되었다. 이어서 황소에게 불리한 3가지 사항이 발생했다. 첫째는 포위로 인한 식량부족, 둘째는 변심한 주온(朱溫)이 당조정에 투항한 것, 셋째는 기사에 능하고 날쌘 사타족(沙陀族)이 당군에 가담한 것이었다. 883년 정월, 이극용(李克用)이 이끄는 4만의 사타군이 황하를 건너 당군과 연합했다. 양전피(梁田陂)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한 황소군은 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철수했다. 이극용이 장안을 핍박하자 황소는 2년 반 동안 장악했던 장안에서 서주(徐州)로 물러났다. 전열을 정비한 황소는 10여개의 현을 점령했지만,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당시에 하남에는 심한 가뭄이 발생하여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884년 4월, 당조정은 이극용을 전장에 투입하여 주온과 함께 황소를 공격하라고 명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황소는 산동성 연주(兗州)로 도주했다가 당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소수의 패잔병을 이끌고 태산(泰山)으로 들어갔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당말에 민란을 일으킨 그는 무려 9년 동안 중원을 누비다가 중국인들이 가장 숭상하는 태산에서 죽고 말았다. 황소의 실패원인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농민기의로 지쳐버린 당조정을 철저히 궁지로 몰지 못한 정치적 무능 때문이었다. 그가 심은 나무의 과일은 선무절도사 주온이 따먹고 말았다. 남북의 대치상황에서도 누군가가 어부지리를 노릴 수도 있다.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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