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인은 했는데, 어디서 만드나?
긴밀 협력만… 결정적 문구 없어

한국 해군 잠수함 장영실함. (출처: 연합뉴스)
한국 해군 잠수함 장영실함. (출처: 연합뉴스)

[천지일보=김빛이나 기자] 한미 정상이 합의한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14일 공개됐지만, 정작 가장 핵심적인 대목인 한국형 핵추진 잠수함(원잠, 원자력 추진 잠수함)의 ‘건조 장소’가 명시되지 않아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팩트시트에는 ‘미국은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다. 미국은 이 조선 사업의 요건들을 진전시키기 위해 연료 조달 방안을 포함해 한국과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다’라는 문장이 등장하지만 그 잠수함을 어느 나라, 어느 조선소에서, 어떤 방식으로 건조할 것인지에 대한 실질적 합의는 빠져 있다.

업계와 전문가들은 이번 발표가 정치적 상징은 컸으나, 사업의 첫 단추인 건조지 결정이 비어 있어 ‘반쪽짜리 승인’이 됐다고 비판한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SNS를 통해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첫 건조지로 언급한 바 혼선은 여전한 상황이다.

이번 팩트시트에서 미국은 처음으로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하는 것을 승인한다”고 명기했다. 한국의 오랜 ‘원잠 불가 방침’을 사실상 뒤집는 내용으로, 외교·안보적으로는 큰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정작 원잠 사업의 출발점인 ‘어디서 첫 함을 건조할지’에 대한 문구가 통째로 비어 있다.

원잠 사업은 ‘원자로-선체 통합’이라는 복합적 공정을 거치는 만큼 설계·건조 주도권, 기술 내재화 장소, 원자로 안전 규제·감독 체계, 핵연료 수급 절차, 군사 보안구역 요건 등이 모두 건조지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이번 발표의 구조는 ‘한국 원잠 승인’과 ‘연료 조달 협력’만 있고, 가장 기본인 ‘건조 위치’는 비어 있다.

한국 산업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필라델피아 조선소’ 언급과 관련해 “관여한 바 없다”고 공식 선을 그었다.

◆트럼프 지목한 필라델피아 조선소 ‘원잠 설비 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정상회담 직후 자신의 SNS에 “한국의 원잠 건조를 승인했다. 첫 건조지는 필라델피아”라고 적었다. 문제는 이 조선소가 원잠 건조 능력이 없는 상선 전용 야드라는 점이다.

필리십야드는 방사선 차폐 설비가 없고, 원자로 격실·냉각계통 통합 경험도 없으며, 군용 보안·품질보증(QA) 시스템도 갖추지 못했고, 원잠 공정을 수행할 숙련 인력도 부족한 ‘4무(無)’에 가깝다.

미국에서도 원잠을 실제로 지을 수 있는 조선소는 제너럴다이내믹스 일렉트릭보트(GD/EB)와 헌팅턴잉걸스 뉴포트뉴스(HII/NNS) 두 곳뿐이다. 이 두 조선소는 이미 버지니아급·컬럼비아급·AUKUS 물량으로 포화 상태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필라델피아 구상’에 대해 “정치적 메시지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모호함이 바로 사업 표류 가능성을 키운다. 정치적 발언은 있었지만, 산업적·기술적·제도적 준비가 전혀 없는 조선소가 특정되면서 실제 건조지가 어디인지, 결정하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만 커졌다.

◆첫 함 해외서 만들 경우 韓 기술·주도권 약화 우려

국내 조선업계와 방산 전문가들은 “첫 함의 건조지가 사업 전체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입을 모은다. 원잠은 1번 함에서 공정 데이터, 고장·결함 통계, 차폐·소음저감 기술, 원자로-선체 인터페이스 최적화 등 핵심 노하우가 축적된다. 이 과정이 해외 조선소에서 이뤄지면 한국은 정치적 승인만 받고, 기술은 배우지 못하는 구조에 놓일 수 있다.

그간 한국은 ‘국내 건조 + 한국형 원자로 통합’을 기본 시나리오로 준비해 왔다. 그러나 미국 건조가 현실화될 경우 국내 산업 생태계에서 수십 년 동안 축적해 온 노하우가 끊기며 ‘주도권 역외 이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법·제도적 장애도 산적

제도적 문제도 핵심 쟁점이다. 미국에서 원잠을 건조하면 국제무기거래규정(ITAR)에 따라 완성된 잠수함은 ‘미국산 무기’로 분류된다. 한국 해군이 이를 인도받으려면 정식 수출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고, 사실상 자국 무기 플랫폼을 해외에서 조립해 다시 들여오는 ‘역수입’ 구조가 된다.

이 과정에서 절차 지연과 비용 증가가 불가피하고, 미국 전략정책 변화에 따라 인도 시점이나 운용 조건이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 가장 민감한 분야인 해군용 핵연료 조달 문제도 가로놓여 있다.

한국과 미국은 민간용 원자력 협력 협정을 맺고 있지만, 군사용 고농축 우라늄 또는 해군용 연료 조달은 별도의 접근이 필요하다. 협정 개정 또는 예외 승인 없이는 추진이 불가능하며, 이는 외교·안보 정책의 최상위급 사안으로 협상만 수년이 걸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미·영·호 잠수함 협력 모델인 AUKUS를 참고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지만,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중국과의 관계, 동맹 내 전략 지위를 고려하면 동일 궤도로 보기 어렵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이번 팩트시트는 한국 원잠 도입에 있어 역사적 전환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핵심 문구가 빠져 있다. “어디서 건조하는가?”라는 질문은 원잠 사업의 첫 페이지이자 마지막 페이지까지 관통하는 문제다.

그럼에도 이번 합의문에는 건조지, 건조 방식, 기술 이전 범위, 조선소 인증·승인 계획, 핵연료 공급 체계, 제도·규제 로드맵 등 어느 하나 명시되지 않았다.

결국 발표 직후 쏟아진 “원잠 시대가 시작됐다”는 기대와 달리, 현실은 정치적 선언만 있고 실질적 계획은 없이 시작된 사업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국내 조선·방산 업계는 “원잠 승인보다 더 중요한 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기본 설계인데, 그 한 줄이 빠진 채 사업을 추진하면 모든 일정이 표류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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