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美와 만남 자체로 성과 평가

‘핵보유국’ 인정 단계로 갔을 듯

중러 밀착에 북미 대화에 부담감

외교 유연성 제한에 전략적 실기

신뢰 구축 통한 돌파구 모색 가능성

조건부 대북제재 해제 로드맵 검토도

지난 2019년 판문점서 만난 북미 정상. (출처: 연합뉴스)
지난 2019년 판문점서 만난 북미 정상. (출처: 연합뉴스)

[천지일보=김성완 기자] 올해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한국 외교의 리더십을 입증한 자리였다.

관심이 쏠렸던 한미 관세 협상 타결, 중국과 일본 등 주요국과의 연쇄 정상회담을 통해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 외교가 기반을 다졌다는 분석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이런 외교적 성과에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측면에서 짙은 아쉬움을 남겼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만남을 원했으나 화답하지 않으면서 북미 정상 회동이 끝내 무산된 것이다. ‘핵보유국’ 등을 언급한 상태라 대화에 나설 여지가 컸기 때문이다.

외교가 안팎에선 북한이 중대 결단을 앞두고 우왕좌왕하다가 대화 재개의 ‘골든타임’을 스스로 놓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많다. 페이스케이커를 자임해온 이 대통령이 북미 대화 견인을 할 수 있을지도 주목된다.

◆북, 트럼프 공개 구애 끝내 외면

트럼프 대통령은 경주 APEC을 계기로 방한 직전까지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 가능성을 시사하며 적극적인 러브콜(구애)을 보냈다.

과거 2019년 6월 일본에서 열린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직후 트윗을 통해 김 위원장과의 판문점 깜짝 회동을 성사시킨 바 있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여러 차례  만남을 시사하는 메시지를 발신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핵보유국(nuclear power) 운운하더니 대북 제재 완화를 꺼내들고 대화에 응한다면 방한 일정을 연장할 수 있다고까지 제시했다.

지난달 29~30일 1박 2일 방한 일정이어서 짧았던 만큼 늘릴 수 있음을 말한 것인데, 북한 측에서 마땅한 반응이 없자 점점 수위를 높이며 올인한 것이다.

노벨상 열정이라는 시각과 함께 미국 내 정치적 상황이 여의치 않자 전 세계의 시선을 잡는 이벤트가 필요했단 의견도 나왔다.

그래서인지 북미 정상 간의 ‘깜짝 만남’ 가능성이 당초 희박한 수준으로 제기됐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적극적 구애에 갈수록 커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북한은 끝내 침묵했고 결국 북미 회동은 불발됐다.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 제안을 외면한 것을 두고 김 위원장이 대화 재가동의 기회를 놓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인데, 만남 자체로 핵보유국 지위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단 설명이다.

◆김정은 전략적 오판 배경은

김정은 위원장의 전략적 오판 뒤에는 미중러 등 강대국들의 복잡한 역학 관계와 그 속에서 북한이 겪는 딜레마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은 최근 러시아와의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고 중국과의 관계도 전략적으로 활용하며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을 탈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현실에서 미국과의 직접 대화에 대한 부담감을 증가시켰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겪었던 북미 대화 경험을 통해 ‘이벤트성 만남’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거나 미국으로부터 원하는 바를 얻기 어렵다는 판단이 북한 지도부 내에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러의 영향력 아래에서 미국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수 있고, 아니면 대화의 파급력과 얻을 수 있는 실익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충분치 않아 중요한 시기를 놓치며 우왕좌왕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대미 협상 노선에 대한 최종적인 교통 정리가 되지 못한 것 아니냐는 것인데, 중러 눈치보기에 북미 대화 재개를 시도하지 못했다는 건 북한의 외교가 중러 연대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방증으로도 해석된다.

북한에 상당한 외교적, 경제적 뒷배가 돼주는 중러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은 상황이라면 굳이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인 깜짝 회동에 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중러와의 전략적 밀착이 북한의 외교적 유연성을 제한하는 요인이 됐다는 얘기다. 결국 이런 복합적인 계산이 북한이 대화의 물꼬를 틀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전략적 실기로 이어졌다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李정부 대북 돌파구는

이번 북미 회동 불발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구축이 쉽지 않은 현실임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반도 평화 체제에 남측은 배제된 한계도 드러냈다.

이재명 대통령이 촉진자 역할인 ‘페이스메이커론’를 외치는 이유다. 북한이 남측과의 대화를 일절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의 구애에도 호응하지 않는다면 대화 자체가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은 APEC 정상회의를 통해 글로벌 선도 국가로 우뚝 섰다는 게 외교가의 시각이다. 이 대통령은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펼치며 미중 간 격돌로 흔들리는 다자 질서 속에서 한국 외교의 위상을 높였다.

내년 봄 미중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고 이 대통령도 방중 초청을 받은 만큼 북미 대화 재개를 넘어 남북 관계도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크지만 여기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나름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새로운 대북 정책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인데, 당장 북미 대화의 운전석에 앉는 대신 북한이 운전대를 잡고 대화에 나설 수 있도록 환경 조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단계적인 신뢰 구축 조치 확대가 우선 꼽힌다. 당장의 비핵화 요구에 앞서 상호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군사적·인도적 대화 채널을 상설화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현 가능성은 낮지만 미국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북한이 수용할 만한 스냅백 조항이 담긴 ‘조건부 대북 제재 해제’ 로드맵을 선제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방안도 목록에 넣어야 한다는 풀이도 있다.

북한이 실현 가능한 비핵화 초기 조치에 나설 경우 즉각적으로 경제적 이익이 돌아올 수 있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통해 북한의 전략적 실기를 만회할 수 있는 퇴로를 마련해주는 것이 이재명 정부의 핵심 돌파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다. 다만 남한 단독이라면 북핵 문제를 견인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하기
키워드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