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성 전 명지전문대 겸임교수/법학박사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가족, 친지, 이웃과 얼굴을 마주하고 덕담과 안부를 주고받은 시간이었겠지만, 마음에 남는 건 꼭 따뜻한 말만은 아닐 것이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한다. “많이 달라졌네” “취직 준비는 잘돼?” “아직도 혼자야?” 같은 말들은 듣는 이들에게 꽤 날카로운 화살처럼 꽂히기 마련이다.

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완성되는 게 아니다. 듣는 사람의 위치와 해석에 따라 그 온도와 결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은 웃으며 말했지만, 듣는 사람은 찌릿한 불편함을 느낀다.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런 대화의 난제를 풀기 위한 하나의 실마리가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셜 B. 로젠버그가 제시한 ‘비폭력 대화(Nonviolent Communication)’다. 그는 “사람의 모든 말은 궁극적으로 감사와 부탁이라는 두 가지 의도로 이뤄져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거나, 혹은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것, 이 두 감정이 인간 언어의 기본이라는 주장이다.

예컨대 “왜 또 늦었어?”라는 말은 화난 비난처럼 들릴 수 있지만, 로젠버그의 틀로 보면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당신이 약속을 지킬 때 저는 안정감을 느껴요. 제시간에 와주실 수 있나요?” 같은 정중한 부탁의 언어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이 줄고 관계도 훨씬 부드러워질 수 있다.

로젠버그의 이론은 일상에서는 물론, 정치의 언어를 해석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다. 정치인의 말은 항상 이중적으로 해석되기 쉽고, 그 진의를 놓고 갈등이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말들을 ‘감사’와 ‘부탁’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상처보다 이해에 가까워질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재명 대통령이다. 그가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시절이던 2017년 “불법을 저질렀다면 누구든 수사받아야 한다. 법 앞에 예외는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지지하며 정의 실현을 위한 ‘부탁’의 언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자신이 야당 대표로서 수사 대상이 되었을 땐 “정적 제거 수사가 벌어지고 있다. 정치 보복은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이 역시 본질에서는 자신을 지켜달라는 ‘부탁’의 언어다. 말의 결은 다르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의 욕구와 요청이 내포돼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러한 언어가 정권을 잡은 이후의 현실과 충돌하는 지점이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 사건이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체포다. 대부분의 언론계 내부와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과잉 권력 행사’라고 해석하고 있다. 

야당 시절 “검찰 권력의 과잉은 민주주의 파괴”라고 강하게 비판했던 이 대통령이 집권 후에는 정권 비판 세력을 향해 물리적 수단을 동원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과거 “법 앞에 예외는 없다”고 외쳤던 말이 정작 자신이나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사후적으로 다르게 해석되거나 부정되고 충돌하면서 말의 진정성을 되묻게 한다.

그러나 로젠버그의 관점에서 보면, 이 역시 결국은 ‘국가 시스템의 정상화’를 위한 요청, 즉 공공질서를 위한 부탁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문제는 듣는 쪽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있다. 반대 진영과 언론은 이를 보복 정치, 공포 통치, 권력 남용으로 받아들인다. 서로의 언어가 ‘부탁’이 아니라 ‘공격’으로 들리기 시작하면, 공감의 공간은 닫혀버린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다. 말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선, 겉으로 드러난 표현보다 그 이면의 마음, 즉 ‘감사’와 ‘부탁’을 읽어내려는 해석의 훈련이 필요하다.

로젠버그는 말한다. “비난은 충족되지 않은 욕구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니 누군가 우리에게 거칠게 말할 때도, 그 말 뒤에 숨어 있는 두려움, 애정,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찾아보려는 노력이 소통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경청이다. 누군가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듣는 일, 나의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그의 감정을 가만히 마주하는 일. 말로만 반응하지 않아도 좋다.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 제스처, 짧은 침묵 그리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수용의 언어가 대화에 훨씬 깊은 신뢰를 불어넣는다.

우리는 누구나 말로 상처받고, 말로 위로받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도, 즉 감사와 부탁의 마음을 읽는 연습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일상 속 모든 말을 ‘감사’와 ‘부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어떨까. 누군가의 비판은 “도와달라”는 간절함으로, 무뚝뚝한 말투는 “관심이 있다”는 표현으로 다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말의 표면에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관계 속에서 훨씬 덜 상처받고, 더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다. 말에 상처받지 않으려는 노력은 곧,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 모든 말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결국 감사 혹은 부탁이라는 두 가지 마음이다. 그 마음을 읽어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사회는 더 적게 분열되고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더 깊은 듣기다.

말 뒤에 숨은 뜻을 헤아리는 힘, 그리고 가볍게 끄덕이는 고개와 짧은 침묵으로도 서로를 받아들이는 여유가 우리를 더 나은 공동체로 이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힘 있는 자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우선 경청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연적 사건으로 얻은 찰나의 권력 앞에서 우쭐하지 말고 겸손해 달라고. 최소한의 신뢰조차 무너지면 ‘감사와 부탁’으로 해석될 최소한의 여지조차 없어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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