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6인 한전·발전 자회사에 소송
황성열씨 “풍년은 오래전 일… 생산량·품질 저하”
온실가스 줄여야 하지만 전력 60% 석탄·가스 의존
“기후 영향 알면서도 에너지 전환 늦춘 한전 ‘위법’”
“극한기후, 농업에 치명적… 선제적·사후적 대응 필요”
![[천지일보=이시문 기자] 35년째 벼농사를 짓는 황성열(63)씨가 논에서 극한기후로 인한 농작물 피해를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5.09.01.](https://cdn.newscj.com/news/photo/202508/3311998_3387755_5242.jpg)
[천지일보=김민희·홍보영 기자] 35년째 벼농사를 짓는 황성열(63)씨는 최근 한국전력공사(한전)를 상대로 제기한 기후 소송 원고에 이름을 올렸다. 국내 온실가스 누적 배출 1위인 한전과 5개 발전 자회사를 상대로 농업 피해의 법적 책임을 묻는 첫 민사소송이다.
손해배상 청구액은 원고 1인당 500만원과 위자료 2035원이다. 위자료 2035원은 우리나라에서 최소한 2035년까지 탈석탄을 실현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액수로, 지난해 주요 7개국(G7) 회의에서 정한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기한이기도 하다.
황씨는 지난달 18일 충남 당진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본지와 만나 “최근 5년간은 ‘풍년’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충남 당진과 서산에서 3만 6000평 규모로 벼농사를 짓고 있다. 예전에는 논 한 마지기(200평)에서 네다섯 가마를 수확했지만, 이제는 네 가마도 채 나오지 않는다. 수확량은 평년 대비 20~40% 줄었고, 품질도 떨어졌다.
![[천지일보=이시문 기자] 황성열(63)씨가 지난달 18일 충남 당진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5.09.01.](https://cdn.newscj.com/news/photo/202508/3311998_3387754_5155.jpg)
예상치 못한 가뭄도 닥쳤다. 당진은 담수호가 농업용수를 공급해 가뭄 걱정이 거의 없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10년 전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3년 전 삽교호 담수호가 말라붙었다. 황씨는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어왔던 당진에서 가뭄을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벼농사는 날씨 변화에 민감하다. 벼가 익는 등숙기에 폭우가 잦으면 알곡이 제대로 차지 않아 쭉정이가 늘고, 폭염이 길어지면 벼멸구 같은 해충이 번식한다. 황씨는 “재작년에는 더위가 오래 지속되면서 벼멸구가 서해안을 휩쓸었다”며 “농약값까지 올라 방제 비용만 한 해에 수백만원에서 천만원이 넘어간다”고 한숨을 쉬었다.
![[천지일보=이시문 기자] 황성열(63)씨가 논에서 극한기후로 인한 농작물 피해를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5.09.01.](https://cdn.newscj.com/news/photo/202508/3311998_3387757_5610.jpg)
올해 농사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7월부터 기록적 폭염과 집중호우가 번갈아 나타난 탓이다. 황씨는 “지금 논에 벼꽃이 활짝 피어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수확기에 가면 병충해와 쭉정이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농업의 끈을 놓으면 할 게 없어서 손해가 나도 버티고 있지만 언제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온실가스를 줄이지 않으면 앞으로 10년도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소송에 참여한 이유를 묻자 황씨가 반문했다. “기후 위기가 오게 된 건 온실가스 때문이고,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은 발전인데 왜 농민만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까.”
![[천지일보=이시문 기자] 황성열(63)씨가 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천지일보 2025.09.01.](https://cdn.newscj.com/news/photo/202508/3311998_3387753_5059.jpg)
◆기후 위기 직격탄 맞는 농민들
황씨의 문제의식은 국가 차원의 온실가스 배출 현황과도 맞닿아 있다. 환경부 온실가스 종합정보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은 6억 9158만톤으로 잠정 집계됐다. 정부는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40% 감축 목표(NDC)를 세웠지만, 앞으로 5년간 연평균 3.6%씩 줄여야 하는 상황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도 최근 보도에서 “한국은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했지만 여전히 전력의 60% 이상을 석탄·가스 발전에 의존하고 있다”며 “재생에너지 비중은 9%에 불과해 OECD 평균의 1/4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에서 기후 위기의 직격탄을 맞는 농민들이 직접 소송에 나서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달 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경남 함양의 사과 농민 마용운씨는 “4월 말이나 5월 초에 피던 사과꽃이 4월 초에 피기 시작하더니 갑작스러운 눈과 추위로 얼어 수확을 망치는 일이 잦아졌다”고 말했다. 제주 서귀포에서 감귤을 재배하는 윤순자씨는 “기온이 오르면서 제주산 감귤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경기 이천과 경북 영덕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는 송기봉·김수옥씨는 기후변화로 복숭아순나방이 번져 나무를 베어내야 했고, 경남 산청에서 딸기를 재배하는 이종혁씨는 폭우로 비닐하우스가 침수되는 피해를 겪었다.

◆법정에서 다툴 핵심 쟁점
소송대리인을 맡은 기후솔루션 김예니 변호사는 본지 통화에서 “기후변화는 특정 기업이나 개인의 책임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농민 피해와의) 인과관계를 어떻게 입증할지가 핵심 쟁점”이라며 “한전이 전 세계 배출량의 약 0.4%를 차지한다는 점을 근거로 그 비율에 해당하는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후솔루션은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방법론을 적용해 분석한 결과 한전 발전 자회사들이 2011~2023년 배출한 온실가스로 인한 손실 기여액이 약 98조 1000억원에 달한다는 계산을 내놨다. 한전은 발전량의 95% 이상을 화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석탄 발전 비중이 71.5%에 이른다. 반면 국내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9.5%에 불과해 공기업들이 직접 확대하기보다는 재생에너지 인증서(REC) 구매에 의존해 왔다는 지적이다.
이어 김 변호사는 한전이 ‘국가 전력 공급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가능성에 대해 “어떤 발전 방식을 선택할지는 기업의 몫”이라며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환을 늦추고, 오히려 해외에 더 오염도가 높은 발전소를 지은 것은 위법하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동안 농민들의 피해는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 이미 일부 작물은 재배가 어렵거나 포기된 경우가 많다”며 “이번 소송이 농민들의 피해를 사회적으로 알리고, 한국이 주요 온실가스 배출국으로서 더 적극적인 기후 대응에 나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선제적·사후적 대응 필요”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이번 소송에 대해 “기업에 경종을 울리는 선진형 소송”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산업과 달리 농업은 광합성 작용에 의존하기 때문에 기후변화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분야”라며 “극한기후가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농업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폭우·폭염·가뭄·홍수 등 극한기후가 일상화되면서 농업 생산성과 품질 모두 저하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후 위기에 대응한 전략과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선제적이고 사후적으로 치밀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