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남양주 홍유릉의 홍릉
최초의 황제의 능으로 조성돼
조선, 청·러시아·일본의 각축장
무참하게 왕후를 살해한 일본
사후 무덤을 떠돌다 먼저 천장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홍릉은 최초의 황제의 능이며 일부는 명 황제 능의 양식을 따랐다. 능침공간의 석물이 제향 공간 앞으로 내려왔다. 정자각 대신 일자형 침전을 세우고 그 앞에는 문무석인,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태석, 낙타석, 석마를 배치했다. 1895(고종 32)년 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 후 시신이 궁궐 밖에서 소각됐다. 이후 왕후에서 폐서인됐다가 다시 복위됐다. 동구릉 내 숭릉 근처에 숙릉(肅陵)의 묘호로 공사를 하다가 김홍집 내각 붕괴와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중단됐다. 1897년에 대한제국 명성황후로 추존되니 청량리 홍릉(洪陵)을 새로 조성했다.
그러나 1900년 홍릉이 불길하다하여 남양주 금곡으로 천장코자 공사를 했으나 정세불안으로 다시 중단했다. 결국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뜨자 금곡의 중단된 공사를 재개했다. 명성태황후를 먼저 천장한 후 고종을 합장했다. 고종의 사후 8년이 지나 고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됐고 1935년에 발행됐다. 그러나 사관의 사초를 토대로 하지 않고 일제가 주도해 편찬했다. 기록은 승자의 것, 지금은 망국의 뒷전으로 사라진 황제부부의 홍릉만이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격동의 1880년대, 그리고 대한제국 쇄락
1873년 고종의 친정 이후 각국의 이양선이 출몰하고 이들과 전투에 이어 조약체결이 이어졌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쇄국정책이 힘을 잃자 1875년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통상수교거부의 정책을 버리고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3개 항(제물포, 부산, 원산)을 개방한데 이어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과도 조약을 맺어 새로운 문물이 밀려들어오는 계기가 됐다.
또한 관군제도를 개혁하고 일본에 두 차례 수신사를 파견했다. 통리기무아문(지금의 총리실)을 설치해 개화정책을 본격화하고 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보냈으며 조사시찰단으로 간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가져와 배포했다. 이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갈등을 고조시켰다. 개화의 바람으로 신식군대가 설치됐으나 이들에 비해 차별(임금체불과 불량미 제공)을 받던 구식군대가 반발해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났다. 이는 민씨외척의 정권의 붕괴와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불러왔다. 민씨는 청나라의 구원을 요청했다. 3천명의 청군이 주둔하게 됐고 그런 가운데 미국에 이어 3년간 영국, 독일, 이태리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1884년 급진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 박영효 등이 나섰다.

그러나 황후 민씨에 의한 청군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이듬해 조선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동등한 세를 갖게 된 청·일 톈진조약이 체결됐다. 이후 청나라와의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향후 10년간 광혜원, 철도, 전화, 학교, 전등, 시카고박람회 등 많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치는 불안해 1894년 3월부터 9월 전봉준이 나선 반봉건 반외세의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해 관군과 농민군의 전면전이 벌어졌다. 이의 수습에 1차 김홍집내각이 나서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일본도 이를 빌미로 조선에 주둔하게 됐다. 김홍집의 내각은 1896년까지 갑오개혁 두 차례와 을미개혁을 추진했다.

민씨 일파는 러시아편에 서면서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이범진(일제병탄 후 자결, 헤이그 특사 이위종의 부친)·이완용 등을 등용, 제2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했고 갑오개혁(갑오경장)을 단행했다. 청일의 갈등은 결국 1894년 양국 간 전쟁으로 이어졌고 일본이 승리했다.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간섭을 하고 한국 최초 헌법인 ‘홍범 14조’를 선포해 청나라에서 조선이 독립한 것처럼 보이고 실제 조선 지배를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1895년 3월 조선의 국고는 고갈되니 일본은행에서 6% 이자를 주고 300만원의 차관을 빌렸다. 전봉준과 일파가 교형에 처해졌고, 8월 20일 명성왕후가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있었다. 실록은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에서 붕서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틀 후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했다가 왕태자가 상소하니 빈의 칭호를 내렸고 10월에는 두 달 전의 서인강등을 취소했다.
1896년 2월 위협을 느낀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영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있었고, 김홍집·정병하·어윤중 등 개화파가 살해되며 친 러시아 내각이 들어섰다. 고종은 1897년 2월 러-일 협상에 따라 아관파천으로 떠난 지 1년 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다. 고종을 통해 친러 내각을 내치고 유길준(최초로 일본·미국유학, 서유견문록 출간) 등으로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했다. 종두·체신·단발령·양력· 도형폐지 등을 시행했다.

◆대한제국과 황제, 거세진 일본의 지배야욕
고종은 1897년 8월 연호를 광무로, 10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고 환구단(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독립신문 발간, 독립협회 창립, 독립관 건립 등으로 국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1898년 2월 흥선대원군이 사망했는데 한 달 전에 부인 민씨가 먼저 세상을 떴다. 고종은 혼자가 됐다. 7월 안경수가 군인들을 매수해 황제양위를 시도하다가 실패했고 9월 김홍륙이 황제와 황태자에 독이 든 커피를 올린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1899년 청과 통상조약을 맺었으니 대등한 국가로써의 조약이었다. 세상은 급격하게 변했다. 은행에 이어 전차와 철도, 한강철교, 전화가 설치되는 등 신문물이 쇄도했다. 사도세자와 흥선대원군, 순빈 엄씨는 각각 왕과 왕비로 추존됐다. 그러나 일본에 의한 단발령, 일본군 한성진입, 황무지 개간권 요구, 친일단체 확대, 독도의 다케시마현 편입 등의 주권침탈이 심해졌다. 일본은 마침내 1905년 9월 만주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둘러싼 러·일 전쟁에서 승리했다. 대한제국은 일본 앞에 풍전등화였다. 11월 5일 곽종석이 상소하기를 “일본은 동양 단결로 강국을 막자면서 오히려 역신들과 몰래 결탁해 국모를 살해하고 권리를 빼앗고 백성에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고도 오히려 상호보존해주고 보호해준다 합니다. 내치의 방도와 자치권은 폐하와 정부가 시급히 처리하고 기강을 세워 당면한 일을 시행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고종은 “짐의 마음을 터놓고 직접 맞대고 말하고자 하니 즉시 올라와 간절히 기다리는 나의 마음에 부응하라”고 했다.

11월 10일 고노스케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협정문초안을 올렸고 17일 외부대신 박제순과 한·일 협상조약((을사5조약·을사늑약)에 기명하니 외교권이 박탈됐다. 민영환·조병세·홍만식 등이 자결하며 항의했다. 고종은 미국공사 헐버트에게 밀서를 보냈으나 이미 7월에 미일 간에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의 지배를 용인한 ‘가쓰라 테프트협정’이 체결된 상태였다.
일본의 공세는 심해져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고 정2품 이완용이 내각 총리대신이 됐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헌병대가 한성의 치안을 맡았고 이어 황실재산을 조사하고 국유 미개간지를 임대·매매토록 법을 제정했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이준 등을 파견해 국권회복을 호소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와 서구의 불용으로 실패했다. 일본은 오히려 고종을 폐하고 황태자(순종)를 내세웠다. 1907년 7월 18일 고종은 “백성의 곤궁과 나라의 위기가 이토록 심하니 두려워 얇은 얼음을 건너는 듯하다. 다행히 황태자가 있으니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가 대리하게 하노라”고 했다. 19일 순종이 즉위했다.

실록은 “일본 천황폐하가 친히 축전을 보냈고 이에 사례전보를 보냈다”고 했다. 다음날 헤이그 밀사 3인을 “밀사를 사칭하여 외교를 망쳤다”며 교형과 종신형에 처하도록 했다. 일본은 정미7조약의 체결, 군대와 경찰을 해산했다.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고 일본은 1910년 한일합방을 단행하였다. 일제는 합병 후 대한제국의 왕실과 친인척을 회유하고자 막대한 은사금을 뿌렸다. 명성황후가 살해되어 불태워지고 고종은 강제로 양위됐고, 많은 인사들이 죽음을 당했지만 한일합방의 주동자나 추종자, 방관자들은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일본은 돈과 훈장, 작위를 주면서 이들을 이용했다. 이때 일본에 적극 협조한 이완용을 비롯한 고영희, 박제순, 이병무, 조중응 등 20명은 오늘날 각각 을사오적(1905년 을사조약체결 5명), 정미칠적(1907년 정미7조약체결 7명), 경술국적(1910년 한일합방체결 8명)으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책임은 군주였던 고종에게 안겨져야 했다.
고종은 12년간 덕수궁에서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승하했다. 고종실록의 편찬은 시노다 지사쿠(편찬위원장), 이항구(이완용의 아들, 부위원장)와 오다쇼고(감수)가 주도했다. 1997년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나 고종실록은 제외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