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서삼릉 예릉- 철종·철인왕후의 쌍릉

폐족에서 화려하게 왕위 올라
농사짓던 강화도령으로 알려져
이양선 출몰하고 삼정은 문란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힘 못써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서삼릉의 예릉은 조선 제25대 왕 철종과 철인왕후의 쌍릉이다. 철종은 강화에서 농사짓던 총각을 왕으로 데려왔다 하여 ‘강화도령’으로 알려져 있다. 헌종이 후사없이 21세에 승하하니 왕실은 혈통을 거슬러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손자 이원범을 찾아냈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빈약한 배경의 철종은 영조의 후궁(영빈이씨)이 낳은 사도세자(추존 장조)와 숙빈 임씨 사이의 증손이었다. 할아버지 은언군은 왕족임에도 모반죄에 연루돼 가족과 유배돼 사사됐다. 그런 집안의 철종이 왕이 된 것은 가문과 개인의 영광일수도 있겠으나 나라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도정치 앞에서 개혁을 시도한 왕은 힘과 역할이 못 미쳤다. 왕의 배후에 있는 안동김씨는 국정을 장악했고 조정과 관리들은 부패했으며 삼정문란으로 백성은 피폐했다. 영국, 미국 등의 이양선이 출몰했지만 대책도 없었다. 국운은 쇠락하고 있었다. 예릉을 찾아간 여름 낮은 유난히 덥고 힘들었다.   

예릉은 철종과 철인왕후의 쌍릉이며 ‘국조상례보편’에 따른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예릉은 철종과 철인왕후의 쌍릉이며 ‘국조상례보편’에 따른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대가 끊긴 조선왕조, 누구든 없소?

헌종이 후사도 없이 죽자 왕실은 다급해졌다. 영조 이후 왕위를 잇기가 녹록치 않았다. 연이어 3명의 장자가 일찍 죽고 왕위는 둘째와 손자에게 이어졌다. 영조의 장자(효장세자)가 9살에, 둘째 사도세자가 27세에 죽고 장손 의소세손도 2살에 죽었다. 영조의 왕위는 둘째 손자(정조)가 계승했다. 정조도 장자(문효세자)가 4살에 죽으니 둘째 아들(순조)에게 계승했고, 순조도 장자(효명세자)가 21세에 죽으니 손자(헌종)에게 왕위를 이었다. 헌종도 자식이 없이 승하하니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그나마 혈통으로 남아있는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의 아들 은언군(정조의 이복동생)의 가계를 살펴보았다. 은언군은 부인 송씨가 상계군, 풍계군을, 이씨가 전계대원군를 뒀다. 전계대원군(이광)의 부인 최씨가 이원경을, 이씨가 이경응, 그리고 염씨가 이원범(훗날 철종, 이변으로 개명)을 낳았다. 이중 1849년 헌종이 승하할 당시 살아있던 사람은 18세 이원범과 생모 염씨, 그리고 21세 이경응 뿐이었다. 이경응은 몸이 안 좋았고 전계대원군의 제사를 모시게 되니 이원범이 왕위에 올려졌다.

쌍릉 봉분은 1863년 철종이 승하하니 이듬해 주변의 옛 정릉(중종) 자리에 조성했다. 1878(고종 15)년 철인황후가 동쪽에 자리했다. 난간석 만 둘렀다.(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쌍릉 봉분은 1863년 철종이 승하하니 이듬해 주변의 옛 정릉(중종) 자리에 조성했다. 1878(고종 15)년 철인황후가 동쪽에 자리했다. 난간석만 둘렀다.(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이원범은 강화에 살고 있었다. 1801년 조부 은언군이 강화 유배 후 사사됐고 아버지와 함께 1830(순조 30)년 유배에서 풀려나 한성부 경행방으로 이주했다. 이듬해 이원범이 태어났다. 그러나 1836년 남응중의 역모로 엮여 다시 강화로 유배됐고 다시 풀려난 아버지는  1841년 한양에서 병사했다. 1844(헌종 10)년 철종의 이복형 이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적발된 ‘민진용의 옥사’로 인해 이원범 가족은 다시 교동을 거쳐 강화로 유배됐다. 1849년 헌종이 승하하니 순원왕후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이원범을 양자삼아 덕완군에 봉한 후 6월 9일 왕위에 올렸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영묘조의 핏줄은 금상(헌종)과 강화에 사는 이원범 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이광(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이다”라고 했다. 즉위 후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1851(철종 2)년 21세에 김조순의 7촌 조카인 김문근의 15세 딸을 왕비로 맞았다. 철인왕후는 아들을 낳았지만 일찍 죽었고 자신도 1878년 42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망주석은 봉분 좌우에 1개 씩 세웠다. 봉분을 찾는 표시 기둥의 구실을 한다고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망주석은 봉분 좌우에 1개씩 세웠다. 봉분을 찾는 표시 기둥의 구실을 한다고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삼정은 문란, 백성은 혼란, 왕은 자중지란

세도정치(世道政治)는 조광조가 도학의 원리로 주창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의 사림 통치이념이다. 하지만 이는 특정인과 세력이 힘을 쓰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변질되었다. 세도정치는 순조, 헌종, 철종의 3대에 걸쳐 왕보다 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는 조선말기 나라의 기강과 왕에 대한 백성의 존경과 신뢰를 무너트렸다. 나라가 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종의 영의정은 초기 풍양조씨 세력인 조인영과 권돈인이 잠시 하다가 이후 김흥근, 김좌근, 정원용, 김좌근의 안동김씨 세력으로 이어졌다. 안동김씨 권력의 뿌리는 인조 때 숭명배청의 지조로 척화론으로 상징되던 김상헌(좌의정)과 그의 형 김상용(우의정)이다. 이는 손자대 3수(김수중, 김수홍, 김수항)와 증손대 6창(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 김창립) 즉, ‘삼수육창’으로 번창했다. 여기에는 김상헌의 외가인 동래정씨가 한몫했다.

‘망주석 세호’는 장식용의 작은 호랑이를 뜻한다. ‘국조상례보편’에는 “왼쪽은 올라가고 오른쪽은 내려오는 모양을 새긴다”고 기록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망주석 세호’는 장식용의 작은 호랑이를 뜻한다. ‘국조상례보편’에는 “왼쪽은 올라가고 오른쪽은 내려오는 모양을 새긴다”고 기록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안동김씨가 시종일관 약진했던 것은 아니었다. 김수항이 1689(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사사됐고 1721(경종 1)년 신임옥사 때 장남 김창집과 아들 김제겸, 손자 김성행도 처형됐다. 김수항은 아들들에게 “‘권력의 자리는 힘써 피하라”고 했으나 장남은 기필코 영의정에 오르더니 사사됐고 아들손자까지도 죽음을 당했다. 그 후 4대손까지도 이렇다 할 관직에 나서지 않다가 김조순에 이르러 다시 부활했다. 김조순은 딸을 순조 비(순원왕후)로, 그의 조카 김조근의 딸은 헌종 비(효현왕후)로, 조카 영의정 김문근의 딸은 철종 비(철인왕후)로 만들었다. 또한 아들 김유근(대사성), 김원근(우의정, 영의정), 김좌근(판서, 영의정)이 요직을 차지했다.    

예릉의 장명등은 봉분과 멀리 떨어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예릉의 장명등은 봉분과 멀리 떨어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은 없어

1849년 철종이 즉위했으나 실권은 없었다. 철종 즉위로 순원왕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하면서 김좌근(김조순의 3남이자 왕후의 오빠)이 권세를 차지했다. 김좌근은 신정왕후(헌종의 모친)의 친정인 풍양조씨의 중심인물이자 조만영·조인영·조병구 등과 함께 안동 김씨의 배척에 앞장섰던 조병현(헌종 때 예조·병조·형조·이조판서)을 사사했다. 김좌근은 1849년 선혜청 당상에서 승승장구해 1853년에 영의정, 그리고 순원왕후가 죽은 이듬해 1858년에 다시 영의정이 됐다. 철종은 2월과 5월에 유생들이 김창집의 서원을 세우자 청하니 5월 23일 석실서원에 추배토록 했다. 헌종 때 김수근과 김좌근, 김홍근, 김교근이 실세였다. 1857(철종 8)년 안동김씨인 이들의 형제와 아들들(‘근’자 ‘병’자 항렬)이 대거 벼슬을 차지했는데 김영근(공조판서), 김보근(공조판서), 김문근(금위대장), 김응근(충청관찰사), 김대근(경기관찰사)과 그 아래의 김병학(이조참판, 대사헌, 한성부판윤), 김병교(형조판서), 김병기(호조판서), 김병주(홍문관부제학), 김병국(이조판서), 김병조(예조판서) 등이었다.   

예릉의 장명등은 봉분과 멀리 떨어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예릉의 장명등은 봉분과 멀리 떨어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철종시기에는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의 이양선이 전국적으로 출몰했으며 러시아함대와 미국의 포경선이 출현하고 중국어선의 침범이 잦았다. 방납의 폐단이 심하고 한성에는 도둑이 횡행했다. 철종은 친정 이후 10년이 지난 1859년부터 부정한 관리들을 문제 삼는 등 적극성을 띠었다. 1861년에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훈련도감의 궁궐숙위를 강화하려 했다. 세도정치로 인해 통치기강과 삼정이 문란해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철종은 관료의 기강확립과 농민의 요구를 일부 수렴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철종은 삼정개혁을 공포하고 개혁방안을 모집했다. 그러나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시행하지 못했다.

난간석과 동물 석상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난간석과 동물 석상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한편 동학이 창시·확대되자 이를 탄압하고 교주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체포했다. 1862년 경상도 진주, 함경도 함흥, 전라도 전주 등지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 4월 4일 경상도 안핵사 박규수가 치계하기를 “금번 진주난민의 소동은 오로지 전 우병사 백낙신이 6만 냥의 돈을 가호에 백징(대상이 아닌데도 강제징수)하려 했기 때문에 집단의 감정이 들끓고 노여움이 폭발해서 변란이 돌출하기에 이른 것이었습니다”고 했다. 4월 15일 왕이 이르기를 “수령들 가운데 탐학을 부리고 불법을 저지른 자를 왜 법으로 다스리지를 못하는가?”하며 엄히 다스리라 하였다. 4월 17일 경상감사가 고하기를 “개령(현재의 김천) 백성 수천 명이 감옥을 부수고 죄수를 탈출시키고 인명을 살상하고 불을 지르고 곡식장부를 불태웠으니, 현감 김후근을 파출시키소서”라고 하니 따랐다.

수복방터다.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수복이 거처하는 곳으로 정자각의 오른쪽 앞에 있다.(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수복방터다.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수복이 거처하는 곳으로 정자각의 오른쪽 앞에 있다.(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7.29.

그럼에도 조정은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4월 24일 철종은 강하게 지시했다. “명분 없는 세금과 논밭을 억지로 빼앗고 있다니 백성들이 어떻게 편히 살 수 있겠는가?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일체 혁파한 뒤에 계문하게 하라”고 했다. 5월 5일 익산에서 난을 일으킨 10명을 효수했다. 회덕과 공주, 진주, 부안 등 각지의 민란이 일어나니 주동자들을 참수토록 했다.

‘철종 어진’은 철종의 군복 차림의 초상으로, 1954년 부산에서 화재로 손상됐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천지일보 2024.07.29.
‘철종 어진’은 철종의 군복 차림의 초상으로, 1954년 부산에서 화재로 손상됐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천지일보 2024.07.29.

모두가 삼정의 문란이 그치지 않으니 그 폐해를 바로 잡고자 국청(삼정이정청)을 설치했다. 6월 12일 인정전에 나가 친히 전부(田賦)·군정(軍政)·환곡(還穀)의 삼정의 폐단을 바로잡는 시책이 있었다. 서원도 철폐하였다. 7월 5일 “백성들의 일이 애통하고 국가계책이 어지럽기가 이보다 심한 적은 없었다. 백성과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무엇을 아끼겠는가?”하며 5만냥을 이정청에 내렸다. 또한 대대적인 암행감찰로 탐관을 처벌했다. 11월 영의정 정원용이 삼정의 폐해가 여전함을 보고했다. 철종은 나름대로 정치를 바로 잡고자 노력했으나 역부족으로 결국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병사하였다. 15일 빈전도감에서 왕의 묘효를 철종, 선종, 장종으로 올리니 철종으로 했고 능호를 예릉, 헌릉, 희릉으로 올리니 예릉으로 정했다.

철종 친필로 ‘태평하고 아름다운 기운을 사람이 즐기니  상서롭고 밝음이 날마다 이르네(太平佳氣人有樂 祥瑞凞凞日至來)’ 문구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4.07.29.
철종 친필로 ‘태평하고 아름다운 기운을 사람이 즐기니  상서롭고 밝음이 날마다 이르네(太平佳氣人有樂 祥瑞凞凞日至來)’ 문구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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