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인릉-제 23대 왕 순조·순원왕후의 능

10살에 왕 된 순조, 대비가 수렴청정
신유박해·홍경래의 난 등 정세 혼란
왕세자와 두 공주 잇따라 눈을 감아
7세 헌종, 할아버지의 왕위를 이어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순조(純祖)는 서울 서초동 헌인릉의 인릉(仁陵)에 잠들어 있다. 순조는 정조가 천신만고 끝에 얻은 후계자 아들이다. 1790년 음력 6월 18일 정조와 후궁 유비 박씨의 아들로 태어나 10살 되던 해 왕세자가 됐으며 정조가 승하하니 왕위를 이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3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즉위 후 신유박해의 천주교 탄압,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수해와 전염병, 홍경래의 난으로 혼란했다. 세도정치에 대항해 아들 세자(효명세자, 훗날 추존 문조)에게 대리청정을 했으나 3년 만에 세자가 죽으니 무산됐다. 4년 후 1834(순조 34)년 순조마저 45세로 세상을 뜨니 이듬해인 1835(헌종 1)년에 파주 교하의 인조 장릉 근처에 능을 조성했다. 묘호는 순종, 능호는 인릉이라 했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흉하다 해서 1856(철종 7)년 현 대모산 아래로 천장(묘를 옮김)했는데 이때 세종 영릉과 장경왕후 희릉이 옮겨지며 남은 석물을 사용했다. 1857년에 순원왕후가 세상을 뜨니 인릉에 합장했다. 이때 묘호는 순종에서 순조로 봉해졌다. 인릉 주변에는 천하를 호령한 태종의 헌릉이 있다. 풍수지리가 안 좋았다는 이곳에서 순조는 편히 잠들어 있다. 순한 왕 순조의 인릉으로 가본다.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헌인릉의 입구에 들어서면 인릉이 자리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6.18.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헌인릉의 입구에 들어서면 인릉이 자리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6.18.

◆10살에 왕위 올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정조는 왕세자(훗날 순조)가 10세 되던 해 간택령을 내렸다. 1800(정조 24)년 2월 집복헌에서 왕세자빈 간택을 행했다. 김조순, 서기수, 박종만, 신집, 윤수만 집안의 딸을 선발했고 최종적으로 김조순의 딸로 정해졌다. 정조는 이르기를 “가마에서 나오는 한 처녀를 보고 왕실 어른들이 뉘 집 처자냐고 묻고 가까이 오게 해 보시며 모두 좋아하였다. 그런 처자는 처음 보았다했다. 이는 하늘이 정하고 주신 일로 (안동김씨) 김상헌, 김수항, 김창집, 김제겸이 쌓아올린 경사다”라는 글을 하사했다. 그러나 결혼을 주도한 정조가 6월 27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6일 후 7월 4일 순조가 10살의 나이로 즉위하니 왕실에 왕비는 없고 대왕대비 정순왕후(증조모), 혜경궁(조모), 대비 효의왕후(양모)와 유비박씨(생모)가 있었다. 신하들이 대왕대비에게 수렴청정을 청하니 일곱 번을 거절하다 수락했다. 대비가 정국을 주도했다.

헌인릉의 바깥 진입로에 자리한 재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6.18.
헌인릉의 바깥 진입로에 자리한 재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6.18.

1801(순조 1)년 1월 1일 대비가 하교하기를 “홍국영은 죄가 큰데 작위와 녹봉은 옛날과 같다하니, 빨리 추탈토록 하라”고 했다. 10일 사학(천주교)을 엄금하도록 하교를 내렸다. 벽파가 시파를 물리치고자 신유박해(대규모 천주교 탄압)로 정약용 등과 시파다수가 유배되고 300명의 교인이 학살당했다. 1801년 1월 28일 노비혁파를 단행했다. 하교하기를 “선대왕의 뜻에 따라 지금부터 노비를 일체 혁파하려 한다”고 하니 내사와 각 궁방의 노비 3만 6974구, 관사의 노비가 2만 9093구에 이르렀다. 노비안의 책 수가 각각 160권, 1209권이었으니 이를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도록 했다. 2월 18일 경상도 유생 490명이 연명 상소하여 홍낙임, 채홍원을 탄핵했다. 채제공도 탄핵됐다. 3월 16일 천주교 영세를 받은 은언군(사도세자의 아들) 이인의 처와 며느리가 사사됐다. 4월 은언군과 홍낙임을 처벌하라는 요구가 빗발치니 결국 5월 29일 강화와 제주에 안치 후 사사했다. 조정은 노론벽파가 장악했다.

1802년 1월 20일 영의정 심환지 등이 대비에게 장용영(정조의 호위군)의 혁파를 청하니 “시대가 변했다.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고 식량을 풍족히 하는 것이라 하니 그리하라”고 했다. 규장각도 축소했다. 1802(순조 2)년 8월 10일 대왕대비가 삼간택의 길일을 9월 초6일로 명하니 “대혼을 상호군 김조순의 집으로 정하였다”고 했다. 10월 13일 책비의 예를 행하고 교명문을 내렸다. 2년 만에 왕비(순원왕후)가 책봉된 것이다. 왕비는 순조보다 1년 앞선 1789년 5월 양생방(서울 서소문)에서 김조순과 청양부부인 심씨의 딸로 태어났다. 친정이 권문세가로써 5대조의 위·아래가 삼정승 등을 지냈다.

인릉 정자각은 가로부분의 정전 3칸과 세로 부분의 기둥만 있는 배위청 2칸으로 구성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6.18.
인릉 정자각은 가로부분의 정전 3칸과 세로 부분의 기둥만 있는 배위청 2칸으로 구성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6.18.

◆재난과 반란, 그럼에도 국정운영 순탄

즉위 3년 1803년 12월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거두며 “주상의 나이가 곧 15세에 되어 친히 정사를 행하게 되었으니, 경들은 기뻐 축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순조가 친정을 하고 1년이 지난 1805년 1월 대왕대비(정순왕후)가 승하했다. 순조는 12대 10명의 영의정을 임명했는데 초기에 벽파인 심환지와 서대수를 등용했지만 나머지 8명의 영의정은 시파였으며 이들과 왕권을 행사하려 노력했다. 특히 시파의 김재찬(연안김씨)을 중용했는데 그는 5판서와 삼정승을 모두 지냈고 순조의 종묘배향공신이 됐다. 영·정조를 돕고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홍경래의 난을 수습했다. 순조를 둘러싼 정세는 만만치 않았다. 1809년 초 함경도 민가 1798호가 불에 타고 3월 울산부에 507호가, 제천에서 232호가 불에 탔다. 1801년과 1803년에도 평양부와 함경도 등에서 민가 수천호와 곡식 수천석이 불에 탔었다.

정자각 정전이다. 신령은 능침에서 내려와 북신문을 통해 정전으로 들어온다. 정전은 신령의 자리인 신어평상(神御平床)과 제상을 두는 곳이다. 배위청은 제관이 제례를 하는 월대 위의 공간으로 기둥만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6.18.
정자각 정전이다. 신령은 능침에서 내려와 북신문을 통해 정전으로 들어온다. 정전은 신령의 자리인 신어평상(神御平床)과 제상을 두는 곳이다. 배위청은 제관이 제례를 하는 월대 위의 공간으로 기둥만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6.18.

더욱이 가뭄이 겹쳐 백성은 어려워졌고 관리들은 재정을 채우고자 환곡을 편법 운영하여 백성의 원성을 샀다. 6월 좌의정 김재찬은 “늑분(백성에 강제로 곡식을 빌려줌)의 폐단을 엄히 다스리소서”라고 하니 이에 따랐다. 1811년에 지역차별과 수탈에 불만이 있던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1812년 1월 3일 평안병사가 보고하기를 “평안도의 대원수라는 홍경래와 부원수 김창시, 모사 우군칙이 5백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복동에서 와 모였습니다. 선천부사 김익순이 항복하고 곽산군수 이영식은 도주하였습니다”고 했다. 김익순의 손자는 김병연으로 김삿갓, 김립으로 알려졌다. 홍경래는 향리·장교는 물론 토호와 시골부자를 끌어들여 위세를 키웠다. 그러나 반란은 4개월을 넘기며 관군이 화약 폭파로 성을 부수고 정주를 수복했다. 홍경래 등도 참획했다. 이에 순조는 “승리의 소식이 이르렀다. 군사들이 적병을 대파 잔당들도 일소하니 너무도 통쾌하고 다행스럽다”고 했다. 난군 약 3천명이 체포되고 1200명이 처형됐다. 5월 5일 우군칙이 처형되고 홍경래 등 주동자들의 머리를 거리에 사흘간 내걸었다.

어수선한 정국은 순조 10년을 지나며 안정됐고 인구도 증가했다. 1810(순조 10)년에 한성부에서 인구를 조사한 결과를 올리니 가구는 176만 1887호에 인구는 758만 3945명으로 1801(순조 1)년 12월 30일 조사된 175만 7973호, 인구 751만 3792명보다 4천호 7만명이 늘어 한때 조선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를 기록했다. 이후 조선 인구는 감소했다. 순조 중반 서얼차별이 철폐됐다. 1823(순조 23)년 7월 25일 경기·호서·호남·영남·해서·관동의 유생 9996명이 상소하기를 “벼슬길이 막히고 트임은 오직 선발과 추천의 차별과 제한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신 등은 피눈물 흘리며 성상께 호소하니 특별히 처분을 내려 신 등이 종통을 높이고 정사를 밝혀 습속이 크게 변하고 혜택이 두루 미치게 하소서”하니 알겠다고 했다.

인릉 비각에는 2개의 표지석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천지일보 2024.06.18.
인릉 비각에는 2개의 표지석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천지일보 2024.06.18.

◆세자의 대리청정, 그러나 세상 떠

정순왕후가 세상을 뜨니 왕비는 안동김씨로 대체됐다. 순조의 장인 김조순은 조정을 장악했다. 딸 순원왕후가 결혼 7년 후 1809년 아들 효명세자(추존 문조)를 낳았다. 3명(명온·복온·덕온공주)의 공주까지 더하니 이는 현종의 명성왕후가 숙종과 3명의 딸을 낳은 지 148년 만에 벌어진 왕실의 경사였다. 순조는 1819년 8월 세자가 10세가 되자 풍양조씨 만영의 딸(훗날 신정왕후)과 결혼시켰다. 1821년 효의왕후(정조 비)와 이듬해 유비박씨가 숨을 거두니 왕실에는 순원왕후와 세자빈만이 남게 됐다. 당시 순원왕후의 안동김씨(김조순과 아들 김좌근, 김유근), 순조의 생모 유비의 반남박씨(박준원과 아들 박종경)와 더불어 세자빈의 풍양조씨(조만영, 동생 조인영)의 집안이 세력을 이뤘다. 1827년 2월 순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했고 세자는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 7월 18일 세자가 아들(훗날 헌종)을 낳으니 원손을 본 순조는 할아버지가 됐다. 순조가 37세, 아들 효명세자가 18세였다. 7월 24일 순조는 “아들이 뒤를 이어 기뻤는데, 다시 손자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내 기쁨을 어찌 금할 수 있는가? 영원히 후손이 번성하리니 아름다움이 있으리로다”하니 왕실은 3대가 갖춰졌다.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조선시대에 세운 표석(순조대왕, 순원왕후)이고, 2비는 대한제국 때 세운 표석(순조숙황제, 순원숙황후)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6.18.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조선시대에 세운 표석(순조대왕, 순원왕후)이고, 2비는 대한제국 때 세운 표석(순조숙황제, 순원숙황후)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6.18.

그러나 3년 후 1830년 5월 6일 믿음직한 왕세자가 죽고 말았다. 순조는 비통해했다. 게다가 1832년 4월에는 장인 김조순, 5월 둘째딸 덕온공주, 6월 장녀 명온공주가 잇따라 죽으니 순조는 의욕을 잃었다. 순조 행장에 이르기를 “비통한 일이 잇따랐으므로 일을 꾸려나가는 게 예전만 못하였고, 여름부터 누차 편치 못한 증상이 나타났다. 겨울에 우연히 부스럼 증세가 있었는데 순일(10일) 사이 처방이 효험이 없더니, 결국 11월 13일에 경희궁의 회상전에서 군신들을 버리고 떠나갔다”고 했다. 즉위 34년 45세로 세상을 뜨니 7살의 헌종이 할아버지의 왕위를 잇고 순원왕후는 대비가 됐다. 헌종은 할아버지(순조)의 묘호를 ‘순종(純宗)’, 능호는 ‘인릉(仁陵)’이라 하고 아버지 효명 세자의 묘호는 ‘익종(翼宗)’, 능호는 ‘수릉(綬陵)’이라 하였다. 순원왕후가 세상을 뜨니 철종은 순종의 묘호를 순조로, 왕후의 묘호는 순원왕후로 했다.

인릉 능침이다. 인릉을 조성하며 주변에 묻혀있던 원래 세종의 옛 영릉의 석물과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옛 희릉 석물을 다시 꺼내 다듬어 사용했다. 다시 사용한 석물은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이며, 일부 석양과 망주석, 석마는 새로 제작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6.18.
인릉 능침이다. 인릉을 조성하며 주변에 묻혀있던 원래 세종의 옛 영릉의 석물과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옛 희릉 석물을 다시 꺼내 다듬어 사용했다. 다시 사용한 석물은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이며, 일부 석양과 망주석, 석마는 새로 제작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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