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우리 주변에서 감동적인 사연이 있는 인물, 전문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집중적으로 만납니다. 이런 인물 인터뷰와 함께 화제가 되고 있는 내용을 집중적으로 취재하는 ‘People & Focus’를 연재합니다.

‘열한 살의 유서’ 저자, 탈북자 김은주 씨

“떠올리면 마음이 아파오는 한 사람 한 사람…. 식량난 속에서도 친구인 나에게 손바닥만 한 쑥떡을 내밀며 환하게 웃어 주던 내 친구 선화는 잘 지내고 있을까. 갓난아기 먹일 젖이 없어 물만 들이키다가 끝끝내 아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며 통곡하던 아랫집 아주머니는 이제 그 슬픔 속에서 강하게 일어섰겠지. 바라고 바라던 대한민국에 오지 못하고 몽골 땅에 묻혀 버린 그 아저씨는 더 이상 고통 없는 곳으로 가셨겠지. 소똥에서 옥수수 알을 찾아내어 누가 볼 새라 입속으로 집어넣던 그 아이는 이제 제법 커서 도둑질도 하며 굶지는 않고 있겠지. 나진·선봉의 꽃제비들은 갈 곳이 없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다리 밑을 헤매는 삶에서 이제는 벗어났겠지. 묘비도 없이 지내던 아빠는 저 세상에서 묘소 한 번 찾아오지 못하는 우리를 원망하시지는 않는지. 북한에도 고통이 없는 그날이 꼭 오겠지. 서울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타는 그날을 꿈꾸며…” - 작가의 말 중에서

▲ ‘열한 살의 유서’ 저자, 탈북자 김은주 씨, 9년간의 눈물겨운 탈북 스토리 ‘열한 살의 유서’ 한국어판.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단언하건대, 북한 아이들의 삶 대부분은 우리가 뉴스를 통해 듣고 접한 것 그 이상일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기에 열한 살의 나이에 유서까지 썼어야 했을까. 지난 12월 초 그 사연의 주인공을 어렵지 않게 만났다.

배고픔과 추위, 탈북까지 죽음의 고비를 숱하게 넘기며 2006년 중국과 몽골을 거쳐 엄마, 언니와 함께 한국 땅을 밟은 한국 생활 8년 차인 김은주(29, 여)씨는 여느 탈북자와는 다른 조금 특별한 프로필을 가지고 있다.

김씨는 2012년 프랑스에서 ‘COREE DU NORD 9 ANS POUR FUIR L’ENFER(9년간의 지옥같은 북한 탈출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의 공동저자이자 주인공이다. 책은 이듬해 한국에서도 ‘열한 살의 유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책은 어떻게 출간하게 됐나.

책은 프랑스에서 먼저 나왔다. 탈북자의 말을 들어보면 다들 책 한권 쓸 만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책을 쓰기 전에도 누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을 때 시간이 되면 거절을 거의 하지 않고 모든 인터뷰에 응했다.

책의 공동저자가 있다. 세바스티앙 팔레티(프랑스 ‘르 피가로’의 서울 특파원이자 한불상공회의소 비즈니스 잡지 ‘꼬레 아페르’의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동아시아, 한국과 북한 문제 전문 기자)다. 그는 프랑스 출판사에서 탈북자 이야기에 대한 책 제의를 받았고, 책 쓸 주인공을 찾고 있던 찰나 내가 일하고 있는 단체를 통해 나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자원봉사 차원에서 임했다. 짧은 인터뷰를 거쳐 나로 최종 결정됐는데,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열한 살에 유서를 쓰려고 했다는 것, 젊고 한국 사회에 긍정적으로 잘 적응한 사람, 일반적인 북한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찾았다고 하더라.

책에 가족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다 보니 걱정이 돼 가명을 썼다. 프랑스에서 출간 후 진행한 기자회견 등을 통해 얼굴이 알려지게 돼 한국에서 출간할 때는 본명을 썼다. 평범한 탈북자이지만, 또 평범하지 않은 내 삶을 기억나는 데부터 한국에 오기까지를 써내려갔다.

― 책에 담긴 탈북 이야기를 짧게 부탁한다.

열한 살, 아버지가 영양실조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엄마가 3일 후 돌아온다며 나에게 한 끼 해결할 돈만 주고 언니를 데리고 식량을 구하러 갔다. 그 돈으로 두부 한모를 사 먹고 며칠을 버텼다. 5일째 되던 날도 엄마와 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매일 마중을 나갔는데, 6일째 되는 날 또 혼자 돌아오면서 ‘이젠 힘이 없어 다음날에는 못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고, 서러웠다. 순간 엄마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크지 않았다. 다음엔 내 차례겠지 했다.

혹시라도 (내가) 죽은 후에 엄마와 언니가 돌아오면 내가 애타게 기다렸다는 것을 유서를 통해 볼 것 같다는 생각에 종이를 꺼내 연필로 써내려 갔다. 그런데 그날 기적처럼 엄마와 언니가 돌아왔다. 빈손이었다. 식량난에 다 같이 죽고 싶었지만, 죽지 못했다.

1년간 꽃제비(거지) 생활을 하다가 두만강이 얼었을 때 탈북 시도를 한 번 더 해서 1999년 2월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서 살던 3년 기간, 인신매매도 당했었다. 그러다 들키는 바람에 북송됐고, 2개월 정도 탈북자가 겪는 치욕을 받았다. 이후 운이 좋게 다시 죽음을 무릅쓰고 탈북을 시도했고, 중국에서 잠깐 머물다가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 남북 문화적 차이는 어떻게 다른가.

북한 사람들은 남한의 삶을 드라마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드라마가 현실과 조금 벗어난다 해도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남한에 대해 알아 간다. 어떻게든 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북한 영화가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알려고 하기보다는 부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서로가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남한의 문화 콘텐츠가 실제로 북한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한계가 많다. 한국 문화를 많이 접한 사람들은 북한 정권에 대한 불만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젊은 사람들의 정신이 깨어 있다. 깨어 있는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텐데 북한에서는 많은 제한이 있다.

북한은 3명이 모이면 그중 1명은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보위부에서 지령을 받은 사람도 있다. 북한은 군사 체제라서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끌려간다. 시위해도 금방 무시된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함경북도에서 사람이 굶어 죽었는데도 평양에서는 전혀 모른다. 지역 차가 심한 것도 있지만, 남한처럼 교통이나 통신이 잘 발달해 있지 않고, 늘 감시하기 때문에 감히 뭉치지 못한다.

― 한국 생활은 어떤가.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책도 출간하고, 언론 인터뷰를 여러 차례 했다. 그동안 내 이야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북한에 대해 알게 됐다는 데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면, 과거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다. 또 삶이 불안정해진 것 같기도 하다. 여유 있고, 안정된 삶을 위해 미래를 설계하고 싶다.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어도 할 줄 알아서 통번역 일도 고려하고 있다. 장래에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아직은 모른다.

다만, 내가 받아왔던 만큼 나누면서 살고 싶다. 배고프거나, 부족하게 살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백만 부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가족이 함께 여행도 다니고 여유 있게 살고 싶은 바람뿐이다.

끝으로 그는 내년 초 같은 과거를 안고 살아온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김은주씨는 함경북도 은덕에서 태어나 자랐다. 은덕은 옛 아오지탄광촌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책을 출간하기 전에는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도 출연(2012년 5월~7월, 2013년 6월~7월)했었다. 출간 후에 더 많은 곳에서 북한에 대한 현실을 알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북한을 탈출했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며 다양한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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