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스포츠 활동도 일본인이 주도하게 됐고 우리 민족은 곁다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스포츠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고 일제에 항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사이클 선수로 활약한 엄복동도 그중 하나로, 그가 출전하면 수만 명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일본 선수를 따돌리고 당당하게 1등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48세에 1만m 우승을 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다.
스포츠는 일본인에게 억눌린 감정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일본 선수와 싸울 때는 죽기 살기였다. 축구와 야구, 농구, 권투가 인기가 좋았는데 한일전에는 구름 관중이 모여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일본인을 상대로 한 경기는 민족의 자존심을 건 독립운동이나 다름없었다. 제대로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판정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실력을 쌓기 위한 노력도 남달랐다.
당시 스포츠 기자로 활동한 일본의 가마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 선수들이 주먹 힘을 키운 것은 불리한 판정을 피하고 KO로 이기기 위한 뜻도 있었지만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히 일본인을 두들겨 패서 코피를 흘리도록 만들고 쓰러질 때까지 때려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코피 흘리는 일본 선수를 보면서 쌓인 울분을 터트리고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았던 것이다. 이학래의 ‘한국체육백년사’에도 이런 기록이 나온다. ‘베를린올림픽이 열리기 전 와세다대학 선수들이 원정을 왔는데, 이 때 와세다대학 선수 6명이 모두 KO 패하여 졌다. 그런데 어떤 경기에서는 와세다대학 선수가 로프에 몰려 더 이상 경기가 진행될 수 없는데도 한국인 심판은 그 상황에서 경기를 계속 진행시켜 총독부에서 문제를 삼았다.’
독립을 하고서도 한일전에서 지면 절대 안 된다는 비장한 결의가 있었다. 유명한 프로선수가 후에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말하는 바람에 흥이 깨져 버리긴 했지만, 김일 여금부 선수가 일본인 선수에 박치기를 하고 알밤을 먹일 때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박수를 쳐댔다. 짜고 한 게임이었다고는 하지만 일본놈을 미워하는 우리들 속이 뻥 뚫렸다. 일본도 2차 대전 후 미국의 덩치 큰 백인 선수들을 불러다 당수도로 때려눕히는 모습을 보면서 패전의 아픔을 달랬었다.
스포츠는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건 치열한 경쟁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화합과 존중, 배려와 양보 같은 아름다운 가치가 실현되는 멋진 무대가 되기도 한다. 1991년 지바에서 보여준 탁구 남북단일팀의 쾌거는 갈라진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고 뽐낸 최고의 선물이었다.
곧 인천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린다. 북한도 오고 일본도 온다. 멋진 화합의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을이, 또 즐겁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