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5일 광복절을 전후해 이 땅엔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온 나라는 종교인, 비종교인 할 것 없이 온통 잔치 분위기로 변했다. 전례 없이 대통령까지 공항에 마중 나갈 정도였다면 교황의 방한은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표면적인 의미야 모두가 함께 느끼는 대로겠지만, 시대적 역사적 종교적 섭리 가운데 진행되는 순리적 차원에서는 깨닫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교황의 방문과 함께 떠오르는 시(時)가 있다. 천진무구하면서도 천재적 시인 천상병(千祥炳)의 시 ‘귀천(歸天)’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필자도 70~80년대 인사동 골목길에 천 시인의 미망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는 자그마한 찻집 귀천을 가끔 찾았던 기억이 난다. 음악과 함께 흐르는 시 귀천은 모과차의 향을 더 짙게 하며 무언지 모를 향수에 젖어 들게 하던 아련한 추억 속의 얘기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종교의 부패가 인류의 부패를 가져 왔고, 부패된 이 시대는 낡아진 것이며, 낡아지고 쇠하여진 것은 없어지는 것이라 했으니 가야만 한다. 또 가야 할 구시대는 새 시대를 잉태하고 있으니, 새 시대는 반드시 도래하며, 아니 이미 도래했다.

오늘날이 어떠한 때인가. 2000년 전 예수 초림 때, 천기는 잘 분별하면서 그 시대를 깨닫지 못하던 종교지도자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던 일이 생각난다. 신앙을 잘 한다고 자고하던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이라는 율법은 좇았지만, 그 나머지 약속을 믿지 않아 심판받고, 약속대로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 곧 예수를 영접한 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됐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즉, “한 시대가 가고 한 시대가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는 송구영신이며, 우주만물의 순리이자 섭리였지만 그들은 거역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자고하는 그리스도인들 또한 천기는 잘 분별하면서 이 시대를 분별치 못하고 있다. 마치 모세 율법 속에 매여 심판받은 유대인들 같이, 그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사실 하나로 안일한 신앙을 하며, 시대가 가는지 오는지 천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예수 십자가 지기 전 제자들과 하신 사복음의 약속, 또 십자가 진 후 밧모 섬에 유배돼 있던 제자 요한에게 나타나 기록하게 한 요한계시록의 약속은 알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아예 인정하지를 않는다. 신앙은 곧 약속이다. 어느 종교든 약속이 없으면 신앙도 종교도 아닌 것이며, 그러하기에 종교는 반드시 경서가 있어야 하며, 그 경서는 곧 약속의 비밀이 담긴 글인 것이다. 그 약속의 비밀은 때가 돼야 종교(宗敎)라는 과정을 통해 알 수 있고 나아가 이루어지며, 이루어질 때 깨달아 믿어야 하며, 그 믿음은 이루어지는 역사에 참여함으로 비로소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리 약속(經書, 豫言)으로 준 이유다.

또 다른 차원에서 그 약속은 종교의 한 시대가 끝난다는 것이고, 끝날 때쯤 다시 새 시대가 출현할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끝나는 시대는 왜 끝이 나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이다. 종교가 부패하니 온 세상까지 부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부패한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바로 송구영신이며, 이 송구영신(送舊迎新)은 호시절(好時節)이며, 모든 만물들이 학수고대하던 “만물고대(萬物苦待) 신천운(新天運)”라고 약 400년 전 조선이 낳은 유학자요 천문학자요 예언가인 격암 남사고 선생이 미리 말해 놨던 것이다.

이렇듯이 도래할 새 시대를 창조해 가는 하늘이 택한 사명자 즉, 천택지인(天擇之人)이 있으니, 먼저는 ‘스스로 돕는 자’가 되고, 하늘의 뜻을 다시 증거하고 가르치는 종교를 통해 또 다시 하늘의 뜻을 깨닫는 자들이 있으니, 마찬가지로 스스로 돕는 자가 된다. 이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은 돕게 되니, 이들에 의해 새 시대 새 역사는 경서의 약속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세인하지(世人何知)’라 했듯이 시대는 말세(末世)를 만나 마음이 부패와 타락에 염색돼 도무지 깨닫지를 못한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남사고 선생은 “상제예언 성경설 세인심폐 영불각(上帝豫言 聖經設 世人心閉 永不覺)”라고 했고, “말세골염 유불선 무도문장 무용야(末世滑染 儒佛仙 無道文章 無用也)”라 했으니 바로 말세를 만난 오늘의 종교현실이다.

말라키 예언에 따르면 그의 사후 112번째 교황이 마지막 교황이 될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 주인공이다. 오늘날 천주교 내지 교황은 이 시대 종교의 상징적 존재라 해도 무방하다. 물론 개신교가 있지만, 이 개신교는 천주교가 부패함으로 개혁돼 나온 것일 뿐 기독교라는 그 뿌리는 하나다. 하지만 개혁의 주체로 나온 개신교 역시 부패와 타락의 정도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찌 됐든 교황은 가는 시대를 대변해서 하늘의 역사가 서기동래(西氣東來)한 동방의 나라 이 땅에서 이 땅을 주관하는 정치와 및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가는 시대를 아쉬워하며 질펀한 잔치로 마지막을 알렸던 것이다. 교황은 왜 그렇게 부끄러워했고 낮아져야 했고 미안해야만 했을까. 프란치스코라는 이름값을 해야 했기 때문일까. 아마 부패한 한 시대를 책임지고 마무리하며 떠나야 하는 자신의 역할과 사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증거는 “부디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화합하고 평화를 이루는 가장 풍요로운 하나님의 강복 속에서 참으로 기뻐하는 그 날이 오기까지, 한국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그 새로운 날의 새벽을 준비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라는 교황의 마지막 하직 고백이다. 이는 ‘새로운 그 날’을 이루어 갈 새 시대의 영적 지도자가 이 땅에서 출현했음을 알리는 것이며 나아가 축복한 것이며 바통을 넘긴 것이다. 바로 송구영신이 이루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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