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파뉘르주의 양떼! 이 말은 사회이슈 가운데, 특히 선거철에 자신의 주관 없이 무비판적으로 여론이나 흑색 선동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어리석은 군중을 뜻한다. 그 유래는 프랑스의 의사 작가인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 ‘팡타그뤼엘(1532)’에서 나왔다. 그 소설에서는 교활하고 거짓말쟁이에다가 성격도 괴팍한 ‘파뉘르주’라는 인물이 나온다. 파뉘르주가 어느날 배를 타고 여행하고 있는데 갑판 위에 양떼 마흔 마리가 우글거리는 모습을 보고 양떼 주인에게 물었지만 양떼 주인은 꾀죄죄한 파뉘르주의 옷차림을 보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파뉘르주는 보복하기로 하고 주인에게 다가가 “저기 제일 큰 양을 나한테 팔아라. 값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말했다. 상인이 부르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승강이를 하다가 비싼 가격을 주고 큰 양 한 마리를 사서는 곧바로 바다로 빠뜨려버렸는데, 그러자 다른 양들이 모두 그 양을 따라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작가 라블레는 그 장면을 ‘그 양떼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양들이란 언제나 맨 처음 놈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짐승입니다.’라고 묘사했다.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상인이 양의 꼬리를 잡고 버티어보지만 결국 상인마저 빠지고 마는데, 양떼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던 파뉘르주는 그것을 이용해 상인에게 보복을 한 것이다. 그 소설의 일화로 나온 말이 바로 ‘파뉘르주의 양떼’인 바, 그 이후 자신의 주관 없이 무비판적으로 끌려 다니는 어리석은 군중을 빗대는 말로 사용됐다. 라블레가 ‘팡타그뤼엘’에 이 에피소드를 가미한 것은 그 무렵 프랑스의 우매한 군중을 풍자하고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지금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세상에 살면서 정치나 선거에 무관심한 자들을 이용하는 정치권을 바라보며 때로는 한심한 생각도 해본다. 그럴 때마다 위정자들이나 권력들은 오히려 국민을 피치자(被治者)나 도구로 생각해 의도성을 갖고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면 국민 여론은 그 길에 빠져들어 따라오고야마는 우매한 군중으로 생각하기 일쑤다. 그래서 온갖 조작이나 비방들이 난무하게 되는데 선거철이 닥칠 때마다 더욱 그렇다.
선거가 민주주의 이념을 살찌게 하고, 그 가치를 드높이게 마련인데, 선거의 와중에서 의회나 정치권이 국민의 신망을 받는 것은 보기 드문 현상이니 현실이 안타깝다. 민주주의가 잘 운영되고 있는 선진국이라 해도 의정단상과 선거에서는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외신 보도에 의하면 작년 미국의 의회지지도가 14%까지 떨어져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는 것인데, ‘타협의 상징인 미국의회에서 중도파가 줄고 극단적인 성향이 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60년째 의정 활동 중인 30선의 존 딩겔(민주·미시간) 하원 의원은 지난 2월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지금 의회는 내가 알고 사랑하던 의회가 아니다. 의회에 소속돼 있는 것이 미움을 사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또 많은 의원들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비슷한 변(辯)을 내놨는데, “타협의 정신이 실종된 ‘고장 난 의회’에 더 이상 몸담기가 싫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미국 국민들도 미국 의회가 ‘막장’이라는 데 공감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의회 선진국의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정치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는 한국정치의 현장에서 상대편을 존중하면서 타협의 미덕을 찾는 일이란 어디 가당하기나 하겠는가. 사회이슈가 발생되면 정쟁(政爭)들은 반목질시하면서 서로 상대를 헐뜯으려 으르렁거리고, 사건만 터지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증거까지 조작하는 부정의(不正義)의 사회가 됐다. 공언(公言)을 해놓고도 약속 지키기를 꺼려하고 명백한 잘못이 드러났음에도 함구하거나 변죽을 울린다.
타락한 권력은 국민의 가장 편안한 얼굴을 가장 일그러진 모습으로 거울에 담는 것이니, 낡은 이념과 거짓의 녹슨 칼로 민주주의의 꽃을 전단(剪斷)하게 할 수는 없다. 이제는 잘못된 풍토가 쇄신되고 정치권이 정화돼 새 정치의 꽃을 피워야 할 때다. 국민을 진정하게 주인으로 알고 섬기는 건전한 새 정치가 이 땅에 자리 잡도록 유권자들이 깨어나 장난질 치는 위정자들의 못된 술수(術數)에 장단 맞추지 않아야 한다. 더 이상 국민은 이용만 당하는 ‘파뉘르주의 양떼’가 아니다. 정치판의 나팔에 동조하며 끌려 다니던 어리석은 군중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