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주필)

지금의 미국은 그 같은 전통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아주 엉뚱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들의 정치 무대는 민주주의 본보기가 아니라 공화, 민주 양당 정치 거인들의 정치 야망과 정파의 막가는 대결장으로 타락했다. ‘안 되는 집안’이 시끄럽듯이 지금의 미국 정치판 돌아가는 형편으로 보면 미국은 기울어가는 대제국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미국의 쇠퇴론이 경보음으로 들린 지는 오래된 일이지만 정치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리더십과 경제 사회분위기의 창발성(創發性)과 혁신(Renovation)이 끊어지지 않음으로써 쉽게 무너질 제국은 아니라는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국가 사회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정치가 타락하면 다른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은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가 웅변한다.
미국은 초강대국이지만 무제한의 지폐 발행과 빚으로 연명해감으로써 국가 부도(Default)의 위험을 안게 된 지 오래다.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라는 말이 있다. 듣기에는 부드럽고 온건하지만 본질은 그들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서 달러를 마구 찍어내는 일이다. 미국의 대외채무는 주로 세계 최대 외환보유고를 자랑하는 중국의 신세를 진다. 신흥 경제 대국 중국으로서도 2조에 육박하는 보유외환을 마땅히 미국 채권 말고는 운용할 곳이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 국채를 몽땅 사들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미국 국채 매입 규모는 자그마치 1조 2800억 달러 정도나 된다. 이렇게 보면 미국과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과 중국의 미국에 대한 반 접근 정책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얽혔다.
장사가 안 되는 구멍가게의 문을 닫을 때 셧다운(Shutdown)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구멍가게 문을 닫은 것처럼 셧다운 됐다. 민주당 오바마 대통령과 야당인 공화당과의 대립 때문에 연방정부의 기능이 일시 폐쇄 상태인 것이다. 빚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나라에서 공화당이 지배한 의회가 정부의 채무 한도를 늘려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빚어진 정치 재난(災難)이다. 이로써 미국은 초강대국이며 자신들이 항상 위대한 나라라고 부르는 민주주의 원조국으로서 세계에 차마 못 보여줄 꼴을 보여주고 말았다. 더구나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불행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미치는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다른 나라들에는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 정치권의 막가는 처사는 그들 국민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세계 다른 나라들에 무책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정부 기능의 폐쇄로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 국가임을 애써 강조하면서도 오바마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에이펙(APEC) 정상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오바마 없는 자리에서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국가 주석이 주름을 잡았다. 과거 군국주의 역사에 대해 반성이 없는 일본의 아베 수상은 왕따였으며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오바마는 ‘정부 기능 폐쇄로 자신은 아시아 순방을 포기했으며 정부 폐쇄는 미국의 신인도를 손상시키고 협동을 모르는 나라처럼 비치게 했다’고 현 미국 정국 상황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그는 ‘억지쓰기(Extortion)가 미국 민주정치의 관례가 되도록 할 수는 없기에 예산 문제와 싸울 것’이라며 ‘공화당과 재정문제만이 아니라 건강보험법에 대한 재정문제도 협상할 용의가 있지만 정부 폐쇄를 끝내도록 예산안을 먼저 통과시켜주기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혹여 미국이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했을 때의 파장을 염려하는 중국 일본을 비롯한 세계 주요 나라들도 미국에 관련 경고를 전달하기에 바쁘다.
미국 정치권의 대립은 러시안 룰렛(Russian roulette) 게임과 같다. 룰렛은 도박장의 회전 원판을 말한다. 러시안 룰렛에서의 룰렛은 도박장의 회전판이 아니라 리볼버 권총의 회전 탄창이다. 더 말할 것 없이 러시안 룰렛 게임은 6연발 리볼버 권총에 탄알 한 발만을 넣고 게임 상대와 서로 권총을 돌려가며 자신의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기는 목숨을 건 무시무시한 게임이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죽을지 살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놀이다. 미국 정치권이 이처럼 위험천만한 국가 부도를 놓고 러시안 룰렛 게임하듯 정치 놀음판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러시안 룰렛은 19세기 암울함과 불안감, 퇴폐와 권태감이 사회를 지배했던 제정(帝政) 러시아 시대에 장교들과 귀족들 사이에 번졌던 무모한 놀이다. 담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운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나? 하여튼 미친 짓이다. 지금도 예측이 불가능한 불안한 증시 상황을 러시안 룰렛 장세(場勢),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성공 아니면 실패인 축구의 승부차기를 11m의 러시안 룰렛이라 한다.
미국 정쟁의 주 쟁점은 이른바 오바마 케어(Obama care)로 불리는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안이다. 이것에 공화당이 죽자 사자 반대다. 말 잘하는 정치인들이 동원하는 능란한 수사(修辭)를 접할 때는 누가 옳은지 잘 모른다. 하지만 말이 아무리 좋아도 국가가 부도가 나고 그것이 세계에 재앙이 된다면 자신의 정치 야망과 정파 이기심을 감춘 궤변에 불과하다. 아무도 그 말에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 이렇게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로 가다가도 극적인 타결이 나올 수는 있지만 미국은 이미 망가진 정치의 얼굴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큰 상처를 입었다. 미국의 정치가 양극화로 치닫는다. 이에 덩달아 유권자들도 양극화의 분명한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극단적인 정치의 양극화. 국민의 양극화는 사회에 대한 파괴성을 안게 된다.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다. 그렇다면 미국의 정치 재난이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까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