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주필)

장마는 49일간의 기록적인 릴레이를 이어왔다. 그것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북부 지방에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그 지역에 장대비를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그로 인해 많은 비 피해가 났다. 특히 식량 증산을 위한 산지 개발과 땔감 벌채로 뻘건 민둥산 천지인 북한 지역의 피해가 컸다. 그런가 하면 그 장마통에도 비 한 방울조차 구경하지 못한 지역들도 많다. 이런 지역에서는 비 피해가 아니라 농작물 생육에 문제가 생기거나 적조(赤潮) 피해가 생겨 농어민들을 참담하게 했다.
이번 장마가 보여준 특징의 하나는 중북부 내륙의 집중호우다. 속설에 의하면 화석연료가 타면서 배출하는 탄산가스(CO2)나 배기가스 분진 등의 공해물질과 황사 등이 뒤섞여 무거워진 비구름대가 정상적인 고도를 유지하면서 흘러가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들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무거워진 하중 때문에 고도가 낮아진 비구름대가 설악산이나 태백산맥, 지리산의 높은 준령을 넘을 수가 없어 그대로 일정지역에 머물면서 비를 퍼부어댔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검증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탄산가스 공해가 유발하는 지구차원의 기상이변과 온난화에 민감해진 사람들의 우려를 충분히 읽을 수 있는 항간의 얘기다. 과학은 인과(因果)적 물리 현상을 뛰어넘는 차원의 것은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꼭 믿을 것은 못되지만 과학이 만능은 아니므로 흘려들을 허황한 말만도 아니다.
세계 지도를 펴놓고 볼 때 우리 땅, 한반도가 넓은 땅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더 좁은 나라도 많지만 우리 땅은 좁은 쪽에 속한다. 그 좁은 땅덩어리에서 이상스럽게 비 한 방울 구경하기 힘든 지역도 많았다. 동쪽과 동남쪽 해안 지역 등이 그러했다. 이것 또한 이번 장마의 특징이었다. 그 지역으로는 피서객들이 몰려 흥청거렸다. 그렇지만 비가 와야 할 때, 장마가 찾아와주어야 할 때 그것들이 와주지 않음으로써 그것들의 힘을 받아 자정(自淨) 내지 재생(再生)의 순환을 이루어내야 하는 자연은 흐름이 막힌 것에 심통을 부리고 반란을 일으킨다. 자연의 반란은 즉 인간에게는 재난으로 와 닿게 된다. 남쪽 바다에 부패한 유기물이 바닷물을 빨갛게 물들이는 적조(赤潮)가 생겨 바다 양식장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로 인해 양식 어민들의 피땀 어린 노고를 도로(徒勞)에 그치게 하고 그들의 삶의 의욕을 꺾어 놓았다.
여름 바다는 불타는 태양에 의해 뜨겁게 데워지므로 장맛비나 폭풍우가 몇 번은 식혀주고 뒤집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바다가 다시 깨끗해지고 생명력을 얻어 신선한 물고기와 해초를 길러내게 된다. 긴 장마는 지루하고 폭풍우는 무섭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불가항력의 경우보다는 부주의나 대비를 소홀히 하기 때문인 것이 대부분이다. 둑을 쌓아야 할 때는 둑을 쌓고 피난을 해야 할 때는 피난을 해야 한다. 지진이 예상되는 지역에는 집을 짓지 않거나, 집을 지어야만 할 때는 적어도 내진 설계 정도는 야무지게 하고서 집을 짓는 것이 옳다.
자연의 법칙과 이치를 충분히 알고 자연 현상에 슬기롭게 대처한다면 자연이 무자비할 때의 재앙일지라도 꼭 사람에게 화가 미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평화로울 때의 자연만을 생각하며 쉬이 오만해지고 무모해진다. 그러다가 화를 당한다. 더구나 사람은 개발이라는 명복으로 지나치게 자연을 할퀴거나 파괴함으로써 재앙을 자초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개발 행위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 수준을 벗어나면 안 된다.
자연은, 자연에 내재된 자연의 법칙대로 움직인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은 ‘자연의, 자연에 의한, 자연을 위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그렇다면 자연이 무서운 모습으로 사람에게 재앙을 가할 때라도 그것은 자연이 그것의 법칙대로 움직인 탓이지 특별히 사람을 해칠 의도 같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논리의 성립이 가능하다. 어떻든 자연은 그 법칙에 따라 재생하고 건강성을 회복하며 새 질서를 정비한다. 긴 장마나 바다를 뒤집는 폭풍우가 사람에게 때로 재앙을 낳는다 해서 그것을 원망만 하는 것은 인간의 극단적인 이기심의 발휘다. 사람은 자연의 흐름을 방해할 수도, 방해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의 삶은 자연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다. 인간 삶의 최고 가치인 행복(Happiness)이라는 것도 자연의 터전 위에서만 가능하다. 자연은 사람, 사람의 삶과 일체다. 그만큼 자연은 소중하며 사람은 그 일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emonia)이라는 것은 이성의 통제 아래에서 이루어진 적극적인 생활의 결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행복론 역시 자연의 터전 위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장마는 지나갔다. 대신 곡식을 생육시키고 결실을 알차게 하는 불볕이 내리쬔다. 그 불볕도 금방 청명한 가을, 눈 내리는 겨울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사람은 그 자연의 순환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존재다. 아, 세월 가는 것이 어지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