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2019.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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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관·의녀 사회적 지위 낮아

의술 그만 두고 과거시험 응시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있을까.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질병을 고치는 직업은 참 어렵고도 소중한 일이겠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생명 살리지만 신분 낮은 의관

조금 차이가 있다면 조선시대에는 의관이나 의녀의 사회적 위상이 낮았다. 의관은 양반과 양인 사이에 위치한 중간 신분층, 즉 중인(中人)에 속했다. 양반 사대부는 유학을 으뜸의 학문으로 여겼다. 의관이 되려면 의과시험과 의학 취재에 합격해야 했는데, 이 시험은 잡과(雜科)의 일환을 다루는 것이었다. 이러다 보니 양반층은 의관직을 천하게 여겼다.

조선왕조실록(단종 즉위년 9월 9일자)에는 이같이 기록돼 있다.

‘지금 의원으로서 의약에 관한 책을 아는 자가 적고 대개 보고 들은 것으로써 약제(藥劑)를 쓰니, 이로 인해 인명(人命)을 잘못 상하게 한다. 예조와 삼의사에서 의원으로 삼을 총민한 사람 10인을 골라 아뢰도록 하다.’

하지만 왕명임에도 의학 습독관들은 의술을 익혀도 그만두기 일쑤였고, 과거시험에 응하는 사례가 많았다.

◆의녀도 국가 시험 통과해야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유교의 옛 가르침으로 ‘일곱 살만 되면 남녀가 한자리에 같이 앉지 아니한다’라는 뜻이다. 지금에는 이 말을 쓰진 않지만 유교를 지켰던 조선시대에는 지켜야 하는 법도였다. 의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인들은 자신의 병을 남자 의원에게 진단받기를 꺼려했다.

실제로 태종 임금 때 한 신하가 왕에게 고했다. “여인들이 남자 의원에게 몸을 보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해 치료도 거부하고 죽는 경우가 많다 하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태종은 여자 의사를 키우기로 했다. 이에 천민 신분의 여자 아이들을 뽑아 침술과 진맥법 등을 가르쳤다. 이들이 바로 ‘의녀’다.

의녀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인물은 ‘대장금’이 있다. 그는 의녀로서는 유일하게 임금의 주치의 역할을 했고, 중종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몸을 맡겼을 정도로 신뢰받았던 의원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누구나 의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에서는 ‘의녀 장려책’을 펼쳤는데, 이를 통과해야 했다. 세종실록(세종 16년 7월 25일자)에 따르면, 의녀를 권장하기 위해 1년에 두 차례 쌀을 내렸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제생원 의녀(醫女)들은 날마다 관사(官司)에 출근하여 의서를 읽고 익히며, 병을 보고 침구(針灸)를 하되, 맑고 비 오는 날을 가리지 아니하오니, 임무의 괴로움이 갑절이나 무겁습니다. 이에 1년에 두 번씩 쌀을 하사하옵소서’”라고 기록돼 있다.

성종 9년에는 예조에서는 성적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눠 권장법을 달리했다. 세종 때에 지방에서 의녀를 두기도 했다.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에서 12~13세 정도의 여자 관비를 뽑아 가르쳤고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은 관서에 배정돼 의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반면 성적이 좋지 않은 경우 다시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찌 보면 오늘날도 여성병원이 따로 생겨나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여성 환자가 동성의 의사에게 치료를 받길 원하는 것은 비슷해 보인다. 오늘날 여성의사가 있는 것도 조선시대 의녀들이 힘든 과정을 이겨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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