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칼럼니스트
1981년 5월 30일, 작가 한수산과 그의 문단 동료 시인 박정만, 중앙일보 문화부장 등이 서울 서빙고동 국군보안사령부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는 일이 있었다.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이다.
당시 중앙일보에 한수산 작가가 소설 ‘욕망의 거리’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일부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때 보안사 사령관이 노태우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다.
당사자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작가는 국내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나 수년간 머물렀고, 박정만 시인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1988년 사망하고 말았다.
소설에는 ‘어쩌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 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지방의 아낙네들과 악수하는 경우, 그 관리는 돌아가는 차 속에서면 다 잊을 게 뻔한데도 자기네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보고 들어주는 게 황공스럽기만 해서, 그 관리가 내미는 손을 잡고 수줍게 웃는 얼굴…’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보안사는 전두환 대통령을 빗대 모독한 것이라 여겼다.
또 있다. ‘세상에 남자 놈 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 온 얘기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다.’라는 내용이다. 이 장면이 군인들을 모독하고 조롱하는 것이라고 매도했다.
소설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과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치적인 함의나 비판을 위한 의도는 없었다. 작품 전체로 보면 지엽적인 일부분에 불과한 것을 트집 잡은 것이다.
필화사건으로 작가와 언론인이 고초를 겪고 있는 그 시기에 바깥세상은 축제 분위기로 한껏 들떠 있었다. 그해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 여의도에서 ‘국풍81’이 열리고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기획한 대규모 관제 문화축제였다. KBS가 주관했고, 여의도광장과 둔치 마당에서 5일간 밤낮없이 진행됐다.
16만여명이 행사에 동원됐고 방문객이 천만명을 넘었다. 캐치프레이즈는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청년의 열과 의지와 힘이다’였다. 가요제도 열렸는데, 훗날 ‘잊혀진 계절’로 대박을 친 이용이 ‘바람이려오’로 금상을 차지했다.
당시 야구와 축구 등 프로 스포츠가 출범하면서 온 나라가 스포츠 열기에 휩싸였다. 야간 통행금지가 사라지고 학생들의 두발과 교복 자율화가 발표되면서 새로운 세상이 온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권력의 정당성을 갖지 못한 군부 정권의 기만적 통치, 우민화 수단일 뿐이었다. 한쪽에서는 잔치판을 벌여놓고 뒤로는 죄 없는 작가와 언론인들을 잡아다 고문을 가하는 모순적 행태를 보였다.
훗날 한수산 작가는 장편소설 ‘용서를 위하여’에서, 보안사에 끌려가 극한의 고문을 받는 과정을 자세하게 담았다. 다 써놓고도 그 부분은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교정을 부탁했다고 한다. 소설에 차마 쓰지 못한 더 심한 고문도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필화사건 뿐 아니라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들이 무수히 일어났던 시절이다. 전두환 닮은 배우가 졸지에 방송 출연 금지를 당하고 이순자 닮은 코미디언은 실업자 신세가 되기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런데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인간을 몰아낸 돼지들이 인간의 흉내를 내며 인간처럼 권력을 휘두른 것처럼, 완장 찬 자들이 눈을 부라리고 호루라기를 불며 세상을 겁박하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또 경험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세상이 진보하는 줄 알았는데, 퇴행하고 있다. 농장의 주인이 인간에서 돼지로 바뀌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