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칼럼니스트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남긴 기분 좋은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행사가 열렸던 경주에 관광객이 몰려들고,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맛있다고 칭찬한 황남빵 가게의 매출도 껑충 뛰었다. 트럼프를 미소 짓게 만들었던 신라 금관에 대한 관심도 각별해졌다.
미국 백악관의 역대 최연소 대변인 레빗은 APEC 기간 중 경주 황리단길에서 한국 화장품을 구매한 뒤 자신의 개인 미디어에 사진을 올리고 자랑을 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며칠 뒤, “한국 화장품을 바른 내 피부가 이렇게 좋았던 적이 없다”는 글을 올렸다. 한국을 사랑하고 언젠가 한국을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말과 행적은 더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가 방문한 치킨집도 연일 화제다. 젠슨 황의 기를 받겠다며 길게 줄을 서고, 재고가 모자라 영업을 중지하는 일도 생겼다. 젠슨 황이 먹었던 치킨을 새로운 세트 메뉴로 내놓았다.
이 치킨 업체는 가맹점 가입 상담도 중지했다. 매장을 늘리고 성장을 앞당기는 것보다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급증한 매출액의 일부를 기부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젠슨 황은 한국의 PC방과 e스포츠가 없었다면 엔비디아의 성장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한국을 사랑한다고 했다. 한국에 26만개의 GPU를 우선 공급하겠다고 밝혀 관련 업계 주가를 치솟게 만들었다.
젠슨 황이 소개한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의 인연도 울림이 컸다. 그는 과거 이건희 회장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던 사실을 공개했다. 이 회장은 광역 인터넷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가정을 연결하고, 게임 산업을 키우고, 게임 올림픽이 열리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편지에 담았다고 했다.
이건희 회장은 앞을 내다볼 줄 아는 경영 철학자, 사상가였던 셈이다. 반도체를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선택하고,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며 대대적인 혁신을 예고했던 일화 등은 미래 혁신 경영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런데 잔치가 끝나자, ‘현타’의 시간이 찾아왔다. ‘현타’란 ‘현실 자각 타임’이다.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다가 자신이 처한 실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다. 그 꼴 다시는 안 봤으면 싶은, 지긋지긋한 정치 현실이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바람에 꿈이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자화자찬도 역겹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적당히 해야 봐 줄 만 하다. 국격이 높아졌네 국익이 최대화 됐네, 도랑 치고 가재 잡았네 하면서 저희들 끼리 덕담을 주고받을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다. ‘구제할 때에 외식(外飾)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성경 말씀이다.
여전히 난장판, 아수라장이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곳에 민의는 없고 악의만 가득하다. 상대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패악질을 일삼고 있다.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고, 해괴한 법을 만들어 법을 파괴하려고 한다.
1995년 베이징 특파원 간담회에서 이건희 회장은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 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말했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이것을 정치적 비판이라며 각을 세우기도 했다.
그로부터 꼭 30년이 흘렀다. 당시 2류라고 했던 기업은 그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다. 1류 기업도 많다. K팝을 앞세운 한류 문화 산업은 눈부실 정도다. 행정도 첨단 정보 기술 덕분에 많이 좋아졌다. 문제는 정치다. 정치는 4류도 과분하다. 그냥 쓰레기다. 쓰레기가 나라를 망칠까 걱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