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용 칼럼니스트
오래전 필자가 근무했던 한 중학교는 대규모 임대주택 단지와 맞닿아 있었다. 당시에 “임대단지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기 싫다”며 초등학교 졸업 직전 위장 전입을 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았다.
그 결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두 중학교의 학급당 인원이 10명 가까이 차이 나는 기형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시간이 흘렀지만 아파트 양극화로 인한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요즘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자가야, 전세야?”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고 한다. 같은 단지 안에서도 분양과 임대로 사람을 나누고, 부모가 타고 온 자동차 브랜드로 서열을 매긴다. 계층 구분이 과거에 비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문제는 이런 말들이 아이들의 입으로 곧바로 옮겨간다는 점이다. 놀이터에서 “임대 사는 애랑 놀지 말래”라는 말이 나온다면 그것은 아이의 생각이 아니라 어른의 마음이 흘러나온 말이다.
자녀를 기른다는 건 밥 먹이고 공부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시선과 사람을 대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다. 요즘 MZ세대 부모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이 기본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사고의 뿌리에는 단순한 허영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치열한 사회에서 뒤처질까 두려운 불안,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자리하고 있다. 잠시 남보다 위에 서 있다는 착각이 마음을 붙잡아 주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불안이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비교와 경쟁이 불안을 키울 뿐이다.
예전에는 사람을 볼 때 삶의 태도나 인성을 먼저 살폈다. 지금은 부모가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차를 타는지가 아이의 인성을 대변하는 시대가 됐다. 부모가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나누면, 아이는 교우 관계에서도 계산부터 하게 된다.
친구의 성격보다 집 평수를, 진심보다 겉모습을 먼저 따진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사회에 나가서도 같은 잣대로 사람을 평가한다. 사람을 숫자로만 보는 시선이 자리 잡으면 인간적인 삶은 점점 멀어진다.
주거 형태는 결코 고정된 신분이 아니다. 전세 살던 사람이 집을 살 수도 있고, 자가에 살던 사람이 사정이 어려워져 다시 전세로 돌아갈 수도 있다. 자가냐, 전세냐로 사람을 나누는 태도는 지금의 형편이 그 사람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런 태도는 결국 자신의 불안과 열등감을 남에게 투사하는 일이다. 노예가 번쩍이는 쇠사슬을 차고 있다고 자랑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모습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학습된다는 점이다. 부모가 남을 깎아내리는 말로 우월감을 드러내면 아이도 차별하는 태도부터 배운다. 부모가 불안과 허영으로 관계를 망치며 살면 아이도 평생 타인을 평가하며 불행 속에 살게 된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본 아이는 ‘사람은 조건으로 평가된다’는 규칙을 일찍 배운다. 이 왜곡된 인식이 결국 학교폭력과 따돌림의 씨앗이 된다. 그런 아이가 커서 다시 부모가 되면 사회는 조금씩 더 비상식적인 사람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남겨 줄 가장 중요한 유산은 돈이나 학력이 아니다.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환경이 다른 친구도 존중하고, 남의 형편을 두고 흉보지 않는 마음을 가르치는 일이 진짜 훈육이다.
아이는 부모가 세상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며 자란다. 부모의 시야가 좁으면 아이의 시야도 좁아지고, 부모의 말이 거칠면 아이의 마음도 거칠어진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을 보는 첫 번째 창이다. 그 창이 투명해야 아이도 세상을 맑게 본다. 남을 비교하지 않는 태도, 조건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마음을 부모가 먼저 보여 줄 때 아이도 같은 마음을 품는다. 진심으로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면 부모부터 품격 있는 모습을 갖춰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