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시사평론가

미국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설명은 이제 낯선 얘기가 아니다.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S.Levitsky)와 대니얼 지블렛(D.Ziblatt) 교수는 일련의 저서를 통해 최근 세계 주요국들이 민주주의 위기를 맞고 있으며 특히 미국 민주주의는 ‘퇴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주범으로 ‘정치의 양극화’를 꼽았다. 트럼프 1기 행정부를 보면서 이렇게 평가했으니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행태를 보면 상황은 더 심각할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이던 의회의 견제 기능은 무기력해 보인다. 언론의 역할도 무색하다. 전 세계를 향해 던지는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는 세계 원탑(one top) 미국의 횡포에 가깝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글로벌 질서와 규칙마저 짓밟고 있다. 게다가 동맹국들의 팔목을 비틀어 받아 가는 돈은 천문학적 규모다. 그럼에도 미국 민주당은 속수무책이며, 다수의 국민은 침묵하고 있다. 레비츠키와 지블렛이 경고했듯이 민주주의는 그렇게 무너지는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가 이대로 조종을 울려서는 안 된다는 시민적 저항이 되살아나는 것일까. 지난 4일 미국 뉴욕시장을 비롯해 뉴저지와 버지니아 주지사 등을 새로 뽑는 지방선거가 있었다. 큰 규모의 선거는 아니었지만 트럼프 대통령 당선 1년여 만에 치러진다는 점에서 민심의 첫 평가라 할 만하다. 게다가 내년 11월 3일 치러질 중간선거를 가늠할 수 있는 전초전 성격도 강했다. 선거 결과는 놀라웠다. 큰 관심을 모았던 세 곳 모두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다.

특히 미국 최대 도시이자 ‘세계 자본주의 심장’으로 불리는 뉴욕 시장 선거에서 올해 34세의 인도계 무슬림 조란 맘다니(Z.Mamdani)가 당선됐다. 최초의 무슬림 시장이다. 그리고 맘다니 시장은 미국 정가에서는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스스로를 ‘민주사회주의자’로 자처할 만큼의 강한 진보 성향을 보이고 있다.

맘다니 시장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지지율이 미미할 정도로 무명에 가까운 뉴욕주 하원의원이었다. 그런데 불과 1년여 만에 뉴욕 시장에 당선된 배경은 매우 궁금한 대목이다. 결정적인 것은 뉴욕 시민이 처한 경제적 현실을 정면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무상 교육’ 등의 무상 시리즈뿐만 아니라 최저임금 인상과 부유세 신설 같은 진보 정책 카드를 꺼내 들었다. ‘부의 재분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런 공약이 박수를 받을 만큼 뉴욕시의 빈부격차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주거비도 예외가 아니다. 높은 물가에 더해 주거비까지 인상되자 시민들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다.

특히 저소득층의 경우 소득의 절반 이상이 주거비다. 여기에 전년 대비 5% 이상의 주거비 상승이 본격화되자 결국 뉴욕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에 맘다니 시장의 ‘공공주택 임대료 동결’이 주효했다. 이민자인 그가 이민자가 다수인 뉴욕에서 이민자를 위한 진정성이 통한 것이다.

하나 더 짚을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반발이 예상보다 거세다는 점이다. 이른바 ‘관세 전쟁’은 미국 경제의 인플레이션 기조를 계속 압박하고 있다. 그 결과 ‘부의 양극화’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다. 소수의 억만장자가 미국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으며,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 일가까지 합세하고 있다. 이제 이런 모습은 낯선 것이 아니라 ‘뉴노멀’로 굳어지고 있다.

지난달 1일부터 시작된 연방정부의 업무정지(셧다운)도 민심에 적잖은 역풍을 자초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독단적인 국정운영에 대한 반발이라 하겠다. 여기에 더해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탈락한 뉴욕의 거물급 인사들이 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는 행태도 유권자들에겐 곱게 보이지 않았다. 정책보다 인격적으로도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맘다니 시장은 정책 외에도 젊고 반듯한 ‘신성(新星)’으로 부각된 것이다. 과반 득표의 큰 동력이 됐다는 평가다.

이번 맘다니의 뉴욕 시장 당선은 앞으로 미국 정가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 단지 젊고 신선하며 무슬림이라는 이미지 외에도 그가 내건 ‘민생’ 위주의 진보 정책이 뉴욕에서도 통했다는 점이다. 이는 뉴욕 시민들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트럼프 행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민주주의 파괴, 중산층 붕괴 그리고 자본주의 질서의 몰락에 대한 위기감이 강하게 배어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트럼프식 국가자본주의’로 치닫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과거에 파시즘으로 가는 길이 그랬다. 그 대안으로 민주사회주의자의 목소리가 뉴욕 시민들의 귀를 자극한 셈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미국 정치에 강력한 진보의 목소리가 계속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맘다니 뉴욕 시장의 등장은 미국 정치권에 신선한 충격이긴 하지만 이를 하나의 흐름으로 보기엔 역부족이다. 무엇보다 그의 당선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발심이 컸던 만큼 이는 시간이 지나면 해소될 일이다. 그렇다고 미국 민주당이 진보 정책으로 태세를 바꿀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들도 미국 사회의 주류이며 기득권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민주당에 맘다니 시장이 독특한 캐릭터를 가졌을 뿐이다.

벌써부터 뉴욕 억만장자들이 뉴욕을 떠나겠다며 맘다니 시장에 반발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독설을 날렸다. 민주당도 선거 전략을 바꿔야 하는지를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맘다니는 여전히 당내 비주류이며 미국 정치에서의 이변일 뿐이다. 그럼에도 미국 정치의 개혁성이나 세대교체, 민주사회주의의 비전을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과잉이다. 미국은 여전히 ‘그들만의 제국’에 취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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