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앞두고 찾은 실향민마을
눈 내리던 때 배 타고 피난 와
피난 후 부모 잃고 외로운 삶
오징어·명태 손질로 생계 유지
다른 건 잊어도 딸은 늘 생각

[천지일보=배다솜 수습기자] 아바이마을의 최고령 실향민인 이금순(101)씨가 인터뷰 도중 생각에 잠겨 있다. ⓒ천지일보 2025.10.06.
[천지일보=배다솜 수습기자] 아바이마을의 최고령 실향민인 이금순(101)씨가 인터뷰 도중 생각에 잠겨 있다. ⓒ천지일보 2025.10.06.

[천지일보 속초=김민희 기자, 배다솜 수습기자] 함경도 사투리로 나이 지긋한 남성을 뜻하는 ‘아바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강원 속초시 청호동의 ‘아바이마을’이다.

1951년 1.4후퇴 때 국군을 따라 내려온 함경도 실향민들이 이곳에 집단으로 정착했다. 식수조차 구하기 어려운 모래사장 위에 움막을 짓고 살며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다. 세월이 흘러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1세대 실향민은 10여명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추석을 앞둔 지난달 26일 아바이마을을 찾았다. 마을 전체가 실향의 아픔이 짙게 밴 모습이었다. 담장과 벽에는 ‘아마이 그날이 올까? 와야지비 꼭 그날이 와야지비’ 같은 이북 사투리 글귀와 함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곳에 남은 실향민들은 기억이 흐려져 가는 중에도 70여년 전 피난길의 장면을 생생히 떠올렸다. 북에 두고 온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도 사무치게 남아있었다.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강원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 ⓒ천지일보 2025.10.06.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강원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 ⓒ천지일보 2025.10.06.

◆갯배와 함께 흘러온 세월

장길자(가명, 88)씨는 햇고추가 빨갛게 익은 집 앞마당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장씨에게 ‘서울에서 왔다’며 말을 건네자 “갯배 타고 왔느냐”고 물었다. 갯배는 실향민들이 속초 시내를 오가기 위해 직접 쇠줄을 당겨 움직이던 배로, 아바이마을의 상징이 됐다.

장씨는 열세 살이던 겨울, 부모와 일곱 남매와 함께 나룻배를 타고 피난을 왔다. “눈이 막 올 때 아버지, 어머니, 칠 남매까지 아홉 식구가 나룻배를 타고 노 저어 왔어. 여러 집이 같이 배를 탔지. 그때는 두 달만 있으면 다시 간다고 했는데….”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실향의 세월이 새겨진 듯했다.

[천지일보=배다솜 수습기자] 아바이마을 담장과 벽에 이북 사투리 글귀와 함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지일보 2025.10.06.
[천지일보=배다솜 수습기자] 아바이마을 담장과 벽에 이북 사투리 글귀와 함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지일보 2025.10.06.

◆피난 후 홀로 일궈온 삶

살아온 생각하면 기가 차지…. 지금도 환해.

김옥난(89)씨가 지나온 삶을 떠올리며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은 고생 많이 하고 살았어. 피난 나와서 엄마 아버지가 다 돌아가셨거든. 나는 형제관도 하나도 없었어. 그때가 열다섯 살이었지.

김씨의 고향은 강원도 통천군 임남면 두백리다. 6.25전쟁이 발발한 해 고성까지 피난을 갔지만 인민군이 길을 막아 더 가지 못했다. 이듬해 봄 아군이 바다로 상륙하면서 주문진수산고등학교 배가 피난민들을 실어 날랐다.

김씨 가족은 먼저 와 있던 고향 사람들 덕분에 빈 여관집에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비극은 이어졌다. “우물에 세수하러 나온 젊은 사람들을 보고 인민군이 피난민 열세 명을 붙들어 갔어. 그중에 우리 아버지, 외삼촌, 고향 사람 셋만 살아 돌아왔어.

이후 주문진 피난민수용소에서 지냈다. 휴전이 되고 스물한 살에 작은아버지가 살던 속초 건넛마을로 시집와 아바이마을에 정착했다.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의 방 한편에는 장성한 자녀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큰 외손주의 딸은 초등학교 2학년이다.

[천지일보=배다솜 수습기자] 실향민 김옥난(89)씨가 천지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씨는 열다섯 살에 부모와 함께 피난길에 올라 스물한 살에 시집온 뒤 아바이마을에 70년 가까이 살고 있다. ⓒ천지일보 2025.10.06.
[천지일보=배다솜 수습기자] 실향민 김옥난(89)씨가 천지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씨는 열다섯 살에 부모와 함께 피난길에 올라 스물한 살에 시집온 뒤 아바이마을에 70년 가까이 살고 있다. ⓒ천지일보 2025.10.06.

아바이마을도 세월과 함께 많이 변했다. “이제 이북 사투리 하는 사람들 없어. 피난 왔다가 집에 빨리 갈까 하고 살던 그 양반들 다 돌아가셨지.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이북 사람, 강원도 사람 다 한군데 엉켜 사는 거야.”

고향이 그리운지 묻자 김씨가 답했다. “엄마 아버지 같이 나와서 고향이 크게 그립진 않아. 하지만 엄마 아버지 다 돌아가시고 외롭게 살았지. 사는 게 외로웠어.

◆최고령 실향민의 기억

이금순(101)씨는 아바이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고향은 함경남도 금호지구 남흥리 짜고치마을이다. 남편과 함께 농사지으며 살다가 전쟁이 나자 배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임신 중이던 이씨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딸 하나를 두고 나와야 했다.

[천지일보=배다솜 수습기자] 이금순씨가 천지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5.10.06.
[천지일보=배다솜 수습기자] 이금순씨가 천지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5.10.06.

구리포와 삼척을 거쳐 아바이마을에 정착한 뒤에는 밥을 얻어먹으며 지냈다. 이씨는 “주문진 (피난민수용소)에 밥 얻으러 갔는데 안 주더라”며 “그저 죽 해먹고 밥 얻으러 다니며 살았다”고 말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이씨는 ‘명태순대’를 아느냐고 물어왔다. 명태순대는 함경도와 강원도 등 동해안 북부 지역의 향토 음식이다. 몸만 내려온 실향민들은 억척스럽게 고기를 잡고 명태·오징어를 손질하며 살림을 꾸렸다. 이씨도 그중 하나였다.

“명태 배를 빼고 양념해서 속을 채워 먹으면 너무 맛있어. 명태 애도 넣고 알도 넣고 두부도 넣지. 식해도 담가서 많이 팔았어.”

이씨는 나이가 들수록 기억이 흐릿해져 몇 살 때 피난을 나왔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그러면서도 잊지 못하는 건 피붙이였다. “고향 생각나기야 나지만 어차피 생각 안 해. 못 가고 여기서 죽겠는데. 딸 하나 두고 온 게 늘 생각나.

[천지일보=배다솜 수습기자] 이금순씨가 아바이마을에서 산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5.10.06.
[천지일보=배다솜 수습기자] 이금순씨가 아바이마을에서 산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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