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용 칼럼니스트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작품은 한 중학생 소년이 여학생을 살해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다. 그 소년은 ‘인셀(Incel)’ 문화에 빠져 있었고, 피해 여학생은 그를 ‘인셀’이라 지목한 적이 있다.
이 드라마는 단순한 범죄극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로 여겨지는 존재가 어떻게 혐오와 폭력의 주체가 되는지, 그 배경에 어떤 인터넷 문화와 왜곡된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인셀’은 원래 Involuntary Celibate, 즉 비자발적 독신자를 뜻하는 단어다. 연애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이들의 좌절을 설명하는 용어가 이제는 의미가 변질됐다. 외로움이 증오로, 피해의식이 폭력으로 바뀌면서 ‘인셀’은 점차 하나의 위험한 사회적 징후로 떠오르고 있다. 단순히 영화 속 이야기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고,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인셀은 ‘여성은 상위 20%의 남성만 선택한다’는 식의 왜곡된 80:20 법칙을 신봉하며, 모든 여성에게 적대감을 드러낸다. ‘채드(Chad)’와 ‘스테이시(Stacy)’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잘생기고 부유한 남성과 그런 남자만 쫓는 여성이라는 극단적인 프레임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구조적으로 소외된 피해자’라는 논리를 펼치며, 결국 분노가 사회로 향한다.
문제는 이 분노가 상상 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4년 미국에서 엘리엇 로저는 “나는 사랑받지 못했고, 여성들이 나를 무시했다”며 6명을 살해하고 자살했다. 그는 범행 전 유튜브에 여성 혐오 영상을 올렸고, 인셀 커뮤니티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다.
2018년 캐나다의 알렉 미나시안 역시 엘리엇 로저의 추종자였다. 그는 차량으로 10명을 살해한 뒤 “인셀 혁명 만세”를 외쳤다. 이후 캐나다 정부는 인셀을 테러 위협 집단으로 분류했다.
이런 일이 멀리 있는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여성 혐오 표현이 일상화돼 있으며, 연애나 결혼에서의 실패를 구조 탓, 여성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과 청년층 남성들이 외로움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인셀 문화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엘리엇 로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반응도 나온다.
소년의 시간이 우려스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현실의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지만 청소년 시청자가 인셀 문화를 접하고 모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고립된 감정과 분노를 품고 있던 누군가에겐 작품 속 주인공이 자신과 비슷한 존재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콘텐츠는 메시지를 담되, 그 파급력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
우리는 몇 가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외로움이 증오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다. 외로움은 이해받아야 할 감정이지,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여성은 원인이 아니다. 사회가 청년들에게 충분한 기회와 자존감을 주지 못했을지라도, 그 좌절의 책임은 무고한 여성에게 있을 수 없다. 피해자 코스프레는 오히려 진짜 피해자들을 더 큰 상처로 몰아넣는다.
셋째, 인셀 커뮤니티는 공감과 위로의 공간이 아닌, 분노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온상이 되고 있다.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무기로 삼아 누군가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연대가 아니라 파괴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사회는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혐오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외로움에 귀 기울이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어야 한다.
영화의 대사 중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거예요.”는 외로움이 증오로 번지지 않게 따뜻하게 품어줘야 한다는 말이다. 아이들에 대한 공감과 성찰, 우리 사회가 선택해야 할 길이다.
